국면전환을 꾀하는 것인가. 국정운영에 대한 지지율이 뚝 떨어지고 부동산 정책에 실망한 뿔난 민심이 수그러들지 않자 당정이 공공기관 추가 지방이전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럴듯한 명분은 ‘국토균형발전’이지만 한꺼풀 파고 들어가면 표심을 겨냥한 전략적 계산이 깔려 있다. 일각에서는 지방 표심을 의식한 공공기관 지역 나눠주기에 더해 지자체들마저 유치경쟁에 가세하면서 또 다른 국론분열을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공공기관 일방적 지방 이전, 국가경쟁력 해친다
특히 금융기관의 지방이전은 글로벌 경쟁력을 갉아먹는 자충수가 될 수 있다. 일본·싱가포르 등 아시아 국가들이 ‘포스트 홍콩’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혈투를 벌이고 있는데 금융회사를 분산시키면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없다. 전형적인 산업 경쟁력 역주행이다. ‘제2의 국민연금 사례’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크다.
안동현 서울대 교수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까지 지방으로 이전하는 바람에 기금운용본부장이 기피 대상이 됐던 촌극도 벌어지지 않았느냐”며 “공공기관 지방이전은 정치적 이해득실을 떠나 경제성을 높이는 차원에서 살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책은행 지방이전 반대 태스크포스(TF)의 핵심관계자는 “지방이전은 네트워크 산업인 금융을 하나의 산업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증”이라며 “금융기관을 여기저기 찢어놓으면 글로벌 금융허브라는 청사진은 공허한 메아리에 그칠 것”이라고 꼬집었다. 당정은 공공기관 지방이전 ‘시즌2’에 속도를 내고 있다. 김사열 국가균형발전위원장은 지난 20일 문재인 대통령에게 관련 보고를 했으며 22일 더불어민주당 지도부를 만나 이전 기관과 지역에 대해 의견을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지방 표심을 의식해 객관적 기준 없이 공공기관을 지역배분하거나 경제정책 실책에 대한 국면전환용으로 속도를 내는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금융허브 한다며 국책은행 지방이전 추진…"시대착오적"
오랜 기간 아시아 금융허브로 자리매김한 홍콩은 금융 부문의 인적·물적 자원을 집결하며 경쟁력을 키웠다. 성장 가능성이 높은 중국 본토와 서방 세계를 연결하는 관문 역할을 하는 금융 인프라가 조성되면서 성장을 거듭한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 서울은 지리적 이점상 아시아 금융허브로 성장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정치권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지방 이전설은 이 같은 평가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글로벌 주요 도시들이 금융을 미래 성장 산업으로 천명하고 집적화를 통해 경쟁력을 키우고 있는 것과 달리 국내에서는 지역균형발전 정책이라는 정치적 논리 속에 금융을 도구화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방과 중국을 연결할 ‘제2의 홍콩’ 지위를 두고 아시아권 도시들의 각축전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서울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싱가포르·도쿄 등 금융도시들은 정책금융기관을 수도에 집결해 금융경쟁력을 끌어올리고 있다. 강제로 국책금융기관을 이전하거나 이전하려는 움직임도 없다. 금융경쟁력을 키워 헥시트로 빠져나가는 서방 자본을 끌어오겠다는 전략이다. 반면 서울은 지난 2015년 이후 1차 공공기관 이전으로 금융기관들이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면서 금융경쟁력이 상당히 떨어진 상황이다. 서울의 지난해 국제금융센터지수(GFCI) 순위는 36위로 싱가포르(4위)와 도쿄(6위)보다도 한참 뒤떨어진다.
"동북아금융허브 정책 완전히 포기하자는 것"
각 은행 내부에서도 부정적인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금융업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는 것이다. 산은 노조 관계자는 “지방 이전은 금융 자체를 하나의 산업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1970~1980년대 개발시대처럼 금융을 산업 뒷단에서 돈줄 역할만 하는 도구로만 보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경제 대국인데 금융산업으로 경제 발전을 이끌겠다는 고민보다는 경쟁력을 저하하는 정책만 내놓고 있다”고 지적했다. 수은 노조 관계자도 “수은의 경우 채권을 발행해 수출하는 기업에 금융을 제공하는 기관인데 지방으로 가면 조달비용이 높아지면서 결국 기업에 비용 상승분을 전가할 수밖에 없다”며 “또 개발도상국 유상원조를 위한 대외경제 협력을 이끌어내야 하는데 지방으로 간다면 각국 대사들과도 긴밀한 소통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1차 공공기관 이전 당시 지방으로 내려간 주요 금융 공공기관들의 업무 비효율이 상당하다는 점도 지방 이전을 반대하는 이유로 꼽힌다. 금융경제연구소가 지난해 발간한 국책은행 지방 이전의 타당성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2013년부터 2015년까지 공공기관 전체 출장 횟수는 28.3% 증가했고 출장비는 36.2%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지방 이전에 따른 자발적 퇴직 증가로 인력 수급 문제가 커졌고 비수도권 이전으로 사업경쟁력이 약화된 점도 문제로 지적됐다. 국책은행의 한 관계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언택트 시대라고 하지만 커뮤니케이션 측면에서 업무상 직접 대면이 필요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또 지방 이전으로 고급 인력들이 이탈하는 현상도 나타나 개별 기관의 경쟁력도 저하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뒤숭숭한 공공기관…벌써 아이 학교 알아보기도
더불어민주당이 공공기관 지방이전 ‘시즌2’에 속도를 내면서 수도권 소재 공공기관 직원들의 마음은 뒤숭숭하기만 하다.
서울에 위치한 공공기관의 한 관계자는 “정부 산하 기관이어서, 또 자칫 지방을 비하할 수 있어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고 쉬쉬하는 분위기지만 내부적으로는 이미 불만이 가득 찬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공공기관의 ‘인위적 이전’에 대한 비판도 제기됐다. 또 다른 서울 소재 공공기관 관계자는 “균형발전이라는 공익도 물론 중요하지만 공공기관 직원도 국민인데 거주의 자유를 빼앗긴 셈”이라고 강한 어조로 불만을 나타냈다. 1차 이전 때 지방으로 이전한 공공기관 관계자는 “서울에서 업무 볼 일이 많아 지역과 서울을 오가며 시간과 비용을 허비할 때가 많다”며 “정부는 ‘길거리 (부처) 국장, 카톡 과장’의 비능률을 줄이겠다며 국회 이전을 고민한다면서 공공기관 직원의 비능률은 안 보이나”라고 꼬집었다.
거주지를 옮겨야 한다는 점 역시 최대 고민으로 꼽힌다. 정부는 현재 이전 공공기관 직원을 대상으로 이주수당과 이사비용 지원, 지역 아파트 분양 우선권 제공, 지역 교통편 할인 등 각종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이주 자체에 대한 지원에 그친다. 또 다른 공공기관 직원은 “자녀 교육 문제도 심각한 걱정거리”라며 “벌써 이전 가능성이 있는 지방 근처 광역시에 어떤 학교가 있는지 찾아보는 직원도 있다”고 했다.
특히 수도권 공공기관의 대부분이 추가 지방이전 대상이 될 것으로 점쳐지면서 직원들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한 공공기관 고위 임원은 “지금 수도권에 남은 공공기관들은 1차 이전 때 ‘사업소 대부분이 수도권에 있다’ ‘수도권 기업과 업무를 많이 해야 한다’ 등을 이유로 댔지만 추가 이전 때는 그런 논리를 정부가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며 “정부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기왕 갈 거면 더 여건이 나은 곳으로 가자’는 분위기까지 있다. 실제 각 지방자치단체별로 벌써 공공기관 유치전에 나서 ‘러브콜’을 보내는 상황이다. 또 다른 공공기관 관계자는 “직원들 사이에서 ‘그래도 서울과 가까운 곳이 낫다’는 의견과 ‘서울과 멀더라도 인프라가 갖춰진 곳이 좋겠다’는 의견이 서로 맞서기도 한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임기응변식 이전 추진에 쓴소리도
복수의 더불어민주당 관계자에 따르면 김사열 국가균형발전위원장은 지난 20일 문재인 대통령에게 2차 공공기관 이전 계획을 보고한 데 이어 22일 이해찬 대표에게 자문을 구했다. 이 대표 측근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1차 공공기관 이전에 대한 분석자료와 보완 사항, 그리고 2차 이전에 대한 정책 방향을 설명했다. 이 대표는 전체적인 계획에 공감했고 ‘입지영향평가제 도입’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또 이 대표는 지역 대학과 연계해야 공공기관 이전이 효과적일 수 있다고 김 위원장에게 충고했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연내 예산 범위와 정책 방향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여당은 4·15총선 이전부터 ‘2차 공공기관 이전’을 약속한 만큼 사업이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이 대표는 2018년 9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수도권에 있는 122개 공공기관의 2차 지방 이전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또 지난해 4월 부산에서 열린 민주당·더불어시민당 합동 선거대책위원회 회의에서는 “‘지방 공공기관 시즌2’를 총선이 끝나는 대로 지역과 협의해 공공기관 이전 정책을 확정하겠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정치적 이익에 기반해 단순 공공기관을 나눠놓으면 성공을 장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남기범 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과 교수는 “공무원과 고급 인력들이 혁신도시로 많이 가 있지만 핵심 엔지니어들은 없고 행정 소비 인재들밖에 없다”며 “이 둘(공무원과 엔지니어)을 나눠놓고 혁신의 중심이 된다는 것은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서울과 대항할 수 있는 부산·대구·광주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혁신 클러스터를 만들어야 한다. 공공기관을 유치하려는 각 지자체의 정치 현실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혁신도시는 밑 빠진 독”이라고 주장했다.
국회예산정책처는 2016년 공공기관 지방이전사업 평가에서 “이들 기관이 지방으로 이전한 목적은 산학연 클러스터 구축을 통한 혁신도시 조성이고 이를 위해서는 산학연 협력사업 시행이 요구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적극적인 참여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국토교통부가 지난해 6월 발표한 혁신도시 산학연 클러스터 현황에 따르면 전체 312만㎡의 클러스터 면적 중 63.7%만 분양됐고 입주율은 35.7%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세종=조양준·이지윤·김인엽기자 mryesandn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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