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직장인이 안 그렇겠느냐마는, 전 업종 중에서 특히 은행원들에게 통상 연중 두 차례 실시하는 정기인사는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확실한 주인(오너십)이 없다는 은행 특성 상 학연, 지연 등 속칭 ‘연줄’이 인사결과로 이어지는 경향이 짙어서입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1년 치 업무기록을 정리하다 보면 정기인사를 앞둔 시기에는 서류가 가장 얇다는 말이 있다”며 “그만큼 은행원들이 자신의 인사에 예민하다는 뜻”이라고 말했습니다.
연줄을 통한 그릇된 정기인사 관행을 바로잡으려면 어떤 대안이 있을까요. 국민은행은 답을 인공지능(AI)에서 찾았습니다.
국민은행이 인공지능(AI)를 적용한 직원 인사가 실시 돼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금융권 AI를 활용해 음성봇 고객 상담 서비스를 활성화시킨 적은 있지만 직접 내부 조직인사에 AI를 적용하기는 처음입니다. 금융당국 역시 새롭게 실무협의단을 조직해 AI 활성화 방안 마련에 나서는 등 금융권 인사·조직에 ‘AI바람’이 불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채용비리’로 몸살을 앓았던 은행권에서 채용에 이어 인사까지 AI가 자리 잡는다면 금융권의 투명성과 공정성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국민은행은 최근 1,100여명의 하반기 영업점 직원 인사이동을 ‘AI 알고리즘’ 기반으로 실시했습니다. 하반기 인사 대상자 중 지방 격오지 점포 등 고충이 있는 경우를 제외한 전원이 AI로 인사이동돼 각 영업점에 배치됐습니다. AI 인사는 직원의 업무경력·근무기간·자격증·출퇴근거리까지 감안해 근무지를 선정하는 방식으로 이뤄졌습니다. 직원별 근무지 최적화 외에도 수요·공급에 맞춘 자동검증을 거쳤다. 영업점 내 동일한 직무의 팀장·팀원에게 동시에 인사가 나는 일도 사라졌습니다. 팀장·팀원 동시인사로 해당 직무의 인수인계가 원활하지 않거나 업무의 맥이 끊기는 문제 역시 AI의 자동검증을 통해 원천 차단했다는 게 은행 측 설명입니다.
그동안 국민은행 인사 부문의 혁신은 꾸준히 진행돼왔습니다. 지난 2018년 금융권에서는 처음으로 AI를 통해 채용을 진행했고 올 초 허인 국민은행장은 신년사에서 AI 인사를 공언하기도 했죠. 국민은행은 상반기 동안 AI 인사의 안정성에 초점을 맞춰 검증과정을 진행했습니다. 이번 영업점 이동 배치 후에는 인사제도 시스템 자체를 AI로 전환해 승진과 부서배치 등 인사업무 전체를 ‘사람 손’이 아닌 AI 알고리즘을 통해 실시할 계획입니다.
국민은행의 AI인사는 일단 합격점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AI로 이동·배치한 뒤 직원들의 만족도가 눈에 띄게 높아지고 있어서입니다.
국민은행 인사담당자는 “AI 인사를 통해 공정성과 투명성이 강화됐고 직원들의 신뢰도 역시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체감한다”고 전했습니다. 이어 “AI를 통해 업무 경력뿐만 아니라 출퇴근 거리까지 감안해 근무지를 배치하다 보니 원거리 출퇴근 인사발령은 국민은행에 더 이상 없다”며 “그동안 인사 이후 제기되곤 했던 지연·학연 등에 따른 인사 결과라는 억측과 오해들도 사라지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해당 직무에 필요한 필수 자격증을 보유한 직원을 AI가 자동 배치하는 방식도 도입됐는데 자연스럽게 업무 효율성 역시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실제 H신도시에 거주하는 국민은행 과장 구모씨는 최근까지도 서울 중구의 한 지점에 통근을 위해 오전5시에 기상해야 했고 퇴근 시간에는 2시간여씩 버스 안에서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이번에 새로 발령을 받아 출근하기 시작한 영업점은 거주지에서 불과 도보 10분 거리. 업무 집중도부터가 달라졌습니다. 기업금융 업무를 하고 싶어 관련 자격증을 취득한 것도 도움이 됐습니다. 그동안 맡았던 자격증과 관련 없는 가계여신 업무에서 벗어나 기업금융 부서에 배치됐습니다.
이번 국민은행의 AI 인사는 금융권에 몰아닥친 디지털 혁신의 하나로 금융서비스뿐만 아니라 내부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는 절실함에서 도입됐습니다. 금융권 전체에 다양한 AI 금융서비스와 디지털 금융상품이 나오고 있지만 정작 내부 혁신에는 둔감하다는 자성도 한몫했죠. 허인 국민은행장은 임직원 전체가 디지털 체질을 장착하기 위해 인사(HR) 부문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특히 올해 경영목표를 ‘투명하고 공정한 KB’를 제시한 점도 AI 인사를 앞당기는 계기가 됐습니다. 허 행장은 “과거의 관리, 통제 중심 HR에서 공정·투명성 아래 개방적이고 분권화된 ‘열린 HR’로의 진화를 추진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에 따라 신HR플랫폼 구축사업을 강화하면서 AI 인사 시스템을 고도화했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비대면 서비스가 확대된 것도 AI 인사의 필요성을 부각시켰습니다. 국민은행의 한 관계자는 “1만7,000여명에 달하는 직원들의 효율적이고 정확한 인사 배치를 위해 HR플랫폼을 강화하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비한 디지털 체질을 더욱 강화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금융권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조직 인사에 AI가 도입되면서 파장도 만만찮을 것으로 보이는데요. 그동안 상담 서비스 차원에서 챗봇 수준의 AI를 접목시켰던 금융권은 앞으로의 조직 체질 개선에도 AI를 활용할 것으로 보입니다. 국민은행보다 ‘한발 늦었다’는 위기감도 생겨나는 분위기입니다. 현재까지 주요 시중은행의 AI 활용은 금융상품서비스와 채용 부문에 집중돼 있습니다.
신한은행과 우리은행이 AI형 상담 시스템 기능을 향상시키고 있고 하나은행은 AI알고리즘을 이용한 해외송금 서비스 ‘Hana EZ’를 내놓았습니다. 농협은행은 불완전판매 검증에 AI 기술을 융합시켰습니다. 앞으로 이들 은행은 자산관리와 기업금융 등에 AI 기술을 적용한 금융서비스를 개발하는 한편 복잡한 은행업무 프로세스를 단순화하는 작업에 AI 기능을 고도화할 것으로 보입니다.
아울러 채용과정에서도 AI 바람이 불 것으로 예상됩니다. 현재 하나은행과 국민은행이 AI를 통해 면접자의 표정과 대답 등을 분석, 면접관 참고 자료로 활용 중이고 신한은행도 AI채용을 구체화시키고 있습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아직까지는 AI가 면접 당락을 결정짓기에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디지털 혁신의 일환으로 채용·인사에 종합적인 검증 작업이 빠르게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AI 인사를 포함한 채용이 공정성과 투명성이 확보된다는 점에서 기업의 인사업무 부담이 대폭 줄어들 것으로 전망됩니다. 다른 시중은행 인사 담당자는 “국민은행의 AI 인사 시스템 도입은 금융권뿐 아니라 국내 기업의 인사업무 효율성을 높이는 한편 인사와 채용에 객관적이고 투명한 프로세스가 구축되는 효과가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송종호기자 joist1894@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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