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16일 21대 국회 개원 연설에서 “상법, 공정거래법, 금융그룹 감독법 개정을 신속하게 완료해달라”고 촉구했다. 이른바 재벌 개혁 3법으로 불리는 세 법안은 현 정부 경제정책 기조의 한 축인 ‘공정경제’를 상징한다. 지난 국회에서 야당과 재계의 반발에 성과를 내지 못했으나 여당이 과반 의석으로 추진 동력을 마련한 만큼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 해소에 정부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일주일 뒤 한국은행은 올 2·4분기 경제성장률이 전기 대비 -3.3% 역성장해 외환위기 이후 가장 저조한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1·4분기에 이어 마이너스 성장세를 이어간 것이다. 2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은 국제적으로 경기 후퇴를 공식화하는 경제지표다.
재계에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성장동력이 꺼져가고 있는데도 정부가 기업의 기(氣)를 북돋울 혁신안을 내놓기는커녕 발목을 잡고 있다는 불만이 쏟아져 나온다. 공정경제가 결국 반기업법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우려다. 그럼에도 문 대통령 주문에 여당은 관련 법안 처리를 서두르겠다며 속도전에 나서고 있다. 한 경제단체의 고위관계자는 “한국경영자총협회·전국경제인연합회를 중심으로 수차례 성명을 냈고 의원들을 직접 찾아가 호소해보기도 했지만 달라진 게 없다”면서 “경제를 살리겠다면 기업을 질타하는 지지층이 아닌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토로했다.
실물경기 무너지는데...경영 옥죄는 법안 속출
재계의 이 같은 호소에도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국회에 반(反)기업법안을 무더기로 올리고 있다. 최근 법무부가 제출한 상법 개정안이 대표적이다. 현행 상법은 이사를 선출하고 그중 감사위원을 선임하는데 개정안은 이사 선출 때부터 다른 이사들과 분리 선출하도록 했다. 문제는 이 경우 대주주의 이사선임권이 제한받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점이다. 감사위원 선임 때 최대주주는 3%를 초과하는 주식에 대해서는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수 지분을 갖는 투기 자본이 연합, 감사위원을 선출해 기업의 내밀한 회계정보를 들여다보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 외에 모회사 주식 0.01%를 갖는 주주가 다중대표소송을 낼 수 있게 한 것도 경영에 과도한 개입을 초래할 수 있다. 재계에서 “일사불란하게 의사결정을 해도 모자랄 판에 경영권 방어까지 신경 써야 하나”라는 불만이 나오는 이유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내놓은 공정거래법 개정안도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지주회사 지분 규제가 강화돼 신규로 지주회사로 전환하거나 기존 지주회사가 자회사를 신규 편입할 때 반드시 보유해야 할 자회사 지분을 기존보다 10%포인트를 더 확보하도록 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등에 따르면 현재 비지주회사인 삼성·현대자동차·포스코 등 16개 그룹이 지주회사로 전환할 때 필요한 추가 비용만도 30조9,000억원에 달한다. 신규 투자에 투입하면 일자리 24만4,086개를 만들 수 있는 돈이다. 그럼에도 여당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금융그룹 감독법, 상생협력법 등 반기업법 추가 도입에 시동을 걸고 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위기 국면 속에서 정부가 정책 기조의 초점을 다시 잡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현재 위기가 유동성 부족이 아니라 실물의 문제로 접어든 만큼 기업의 활력을 회복할 방법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경영권이 위협받을수록 대주주는 리스크가 있는 과감한 투자를 꺼릴 수밖에 없다”며 “기업을 옥죄기보다는 기를 살릴 방안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말로만 개혁...관료 보신주의에 신사업 막혀
임기 초반 공정경제와 함께 경제정책의 한 축을 이뤘던 혁신성장은 빛이 바래고 있다. 규제를 과감히 드러내 기업의 기를 살리겠다고 했지만 당국의 보신주의적 행정에 막혀 신산업 창출 의지가 꺾이고 있는 것이다. 대표 정책으로 내세웠던 규제 샌드박스만 하더라도 촘촘히 얽힌 규제를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병원을 거치지 않고 유전체 기업에 의뢰해 검사를 받고 결과를 통보받는 소비자직접의뢰유전자검사(DTC) 사업은 1년째 발을 떼지 못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공용기관생명윤리위원회(IRB) 심의를 받는 조건으로 바이오 업체가 실증특례를 받았지만 여전히 심사에 막혀 있는 탓이다.
대형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잇달아 진출하면서 산업재편이 움직임이 나타나는 금융업에서도 정부가 “말로만 혁신”을 외치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당국은 금융판 규제 샌드박스인 ‘혁신금융 서비스’를 6개월 만에 60개나 지정한 것을 큰 성과로 내밀고는 한다. 하지만 금융혁신 서비스의 근거가 되는 ‘금융혁신지원특별법’은 사업자가 지정 기간이 만료된 후에도 사업을 이어가려면 그동안 유예받은 금융규제를 준수할 수 있다고 입증하도록 하고 있다. 혁신서비스로 지정되면 4년간 규제를 유예받지만 이후에는 사업을 접어야 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규제개혁 업무를 담당했던 한 정부 관계자는 “대다수 공무원이 ‘규제를 풀어줬다가 나중에 책임질 일이 생기면 어쩌지’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 적극적으로 일을 하지 못한다”며 “확실한 면책 특권을 보장해야 일선 공무원이 한발 더 나설 수 있다”고 말했다./세종=김우보기자 ub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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