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이 된 전 금융투자협회장은 항상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다. 기자들이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마주쳐 “차나 한잔 하시자”는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면 얼마 안 가 사무실에서 보자는 연락이 왔다. 한번 마주 앉으면 뒤에 일정이 없는 한 본인이 먼저 일어나지 않았다. 협회 차원에서 추진 중인 업계의 숙원인 규제 완화, 제도 신설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그 논의 및 진행상황 등을 줄줄이 꿰면서 전달했다. 업계의 동향 그리고 언론에 대한 부탁까지 아우르는 그의 이야기는 한 시간을 넘기기 일쑤였다. 오히려 마감 때문에 엉덩이가 들썩이는 기자들이 그의 말을 끊고 나와야 할 정도였다. 기자들만 이렇게 대한 것이 아니다. 업계·정관계 관계자들과 부지런히 만나며 끊임없이 경청·토론·설득을 했다. 물론 이를 협회장으로서 나팔수 역할을 한 것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금투협은 국내의 거의 모든 증권회사·자산운용사·부동산신탁사 등 금융투자사들이 속해 있어 그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단체다. 그러나 “자본시장을 발전시키는 것이 곧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일”이라며 이와 관련한 명확한 과제와 화두를 줄기차게 제기했던 그의 행보에는 일관성과 진정성·설득력이 있었다. 업계에서는 금투협이 어떤 고민을 가졌고 무슨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마디로 ‘존재감’이 있었다. 실제로 금투협이 과거에 줄기차게 목소리를 냈던 퇴직연금제도와 금융투자세제 개편, 모험자본 공급확대 방안 등은 이제 서서히 제도화의 문턱까지와 있다.
그런데 요즘 금투협의 행보를 보면 갸우뚱할 때가 많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6월 말 1차로 나온 금융투자세제 개편방향에 대한 논평이다. 업계의 오랜 요청 사항인 손익통산과 손실이월 공제가 담겨 있기는 했지만 국내 주식투자 양도세 비과세 한도가 2,000만원에 불과하고 공모펀드를 고사시킬 만한 역차별 세제도 포함된 이 안은 겨우 회생 조짐을 보이는 한국 자본시장에 찬물을 끼얹는 내용이었다. 금투협은 그날 오후 “조세중립성과 조세형평성이 크게 제고될 것으로 기대된다. 환영한다”는 논평을 냈다. 기자는 “설마 이게 끝은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며 보도자료에 2페이지가 있는지 확인했으나 그게 다였다. 정부는 ‘동학개미’들의 빗발치는 항의, 그리고 자본시장 활성화라는 대의를 고려해 결국 대폭 수정한 2차 개편안을 내놓았다. 수정안에 대해서도 금투협은 “환영한다”는 논평을 똑같이 내놓았다. 과연 첫 논평은 무슨 생각에서 낸 것인지 의아한 생각이 든다. 더 놀라운 일은 자본시장의 대표적 업권단체인 금투협에서 이런 논평을 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는 점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기대도 없으니 실망도 없다”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또 최근에는 ‘사모펀드 신뢰 훼손과 관련한 입장과 각오 표명’도 나왔으나 역시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요즘 “금투협에서는 무엇을 하는지 존재감이 없다”는 얘기가 나온다. 어떤 종류든 업권협회는 회원사들의 이익과 사회의 대의 두 가지 모두에 부합할 수 있는 제도·문화를 만들기 위해 뛰어다니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존재이유다. 무엇인가를 해서 욕먹는 것이 두려워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존재이유를 부정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혜진기자 hasim@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