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충돌에 조각나는 글로벌 밸류체인…중국 VS 非중국 시대 오나
13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반도체 기업 퀄컴은 미국 상무부의 화웨이 제재 조치로 5G 스마트폰에 장착할 반도체를 공급하는 데 차질을 빚고 있다. 대만 파운드리 기업 TSMC도 화웨이의 주문을 받지 않기로 하면서 화웨이는 독자 개발해온 5G스마트폰용 반도체칩(기린890)의 연내생산마저 포기해야 할 위기에 처했다. 미중 간 충돌은 반도체와 5G 장비를 넘어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페이스북, 위챗, 틱톡 같은 소프트웨어 및 온라인플랫폼 서비스 분야에서도 격화되고 있다.
송영관 한국개발원(KDI) 연구위원은 “5G·반도체 등 첨단기술 분야에서 미국의 제재가 강해질수록 중국은 독자기술 개발에 대한 투자를 늘려 자국 중심의 기술표준으로 경제블록을 구축하고 세계 시장을 중국 진영과 비(非)중국 진영으로 나누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렇게 되면 우리 기업들은 중국에 대한 기술우위를 잃게 되고 미국과 중국의 기술표준에 각각 맞춰 제품을 개발해야 하는 이중·중복투자 부담을 떠안을 가능성이 있다고 송 연구위원은 내다봤다.
특히 중국은 향후 5년 내 제조업 강대국 대열에 진입한 후 오는 2036년부터 세계적 선도국으로 발돋움하겠다는 ‘중국제조 2025’ 계획을 실행 중이고 미국은 이를 적극 견제하고 있어 양국 간 기술냉전이 수년 내 종식될 가능성은 전무하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미국에 맞서 중국도 보호무역주의 경향을 강화하면 중간에 끼인 한국은 대중수출과 지식재산권(IP) 활용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美·中 샌드위치 된 韓, ‘전략적 모호성’이 해답이라지만…
김수동 산업연구원 통상정책실장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 등 동맹국들에) 미국에 줄을 서라고 공개적으로 압박하고 있지만 우리 정부로서는 사드보복 때처럼 중국에 보복을 당할 수 있어 어느 한쪽에 줄을 서기 어렵다”며 “결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최선책은 국가 차원에서는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면서 ‘중국과 우리 기업 간 비즈니스 문제는 민간 자율의 문제이므로 정부가 강제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라고 선을 긋는 방법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중국 등으로부터의 무역보복은 전략적 모호성으로 모면한다고 해도 미중의 시장진입 장벽 강화라는 근본적인 문제는 피해갈 수 없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미국은 자국의 지식재산권(IP)이 들어간 부품·소재·소프트웨어가 중국 기업으로 공급되지 않도록 자국과 동맹국 기업들을 점점 더 압박할 것이고 중국은 기술·제품 국산화로 맞설 것으로 보인다”며 “이렇게 되면 우리 기업들의 대중 비즈니스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특히 게임업계의 시름이 깊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사드보복 이후 중국이 한국 게임에 대한 판호(중국 내 서비스허가)를 좀처럼 내주지 않고 있는데 중국이 미국과 충돌하면 자국 시장진입 규제를 더 높이면 높였지 낮출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며 우려했다. 국내 일부 정보기술(IT) 서비스 기업들은 중국의 시장진입 규제를 우회적으로 뚫기 위해 텐센트 등 중국 기업과 자본제휴 등을 맺어왔다. 그런데 이것이 거꾸로 미국 및 주요 동맹국 시장진입의 걸림돌이 될지에도 관련 업계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높아지는 ‘기술 만리장성’에 韓기업 ‘사면초가’…“혁신이 필요한 때”
미중의 기술 냉전이 우리 기업들에 미칠 또 다른 여파는 글로벌 시장에서 기술 우위의 입지를 잃게 될 가능성이다. 미국은 중국이 선두권까지 따라붙었거나 이미 선점한 기술 분야를 견제하기 위해 이를 한 단계 뛰어넘은 다음 세대 기술로 표준 및 시장의 조기 전환을 꾀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이동통신 서비스 분야에서는 5세대(5G)용 통신장비와 단말기 시장을 중국 화웨이 등이 선점한 만큼 미국은 6세대(6G) 시장의 조기 선점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초 자신의 트위터 계정을 통해 “나는 5G뿐 아니라 6G 기술이 미국에서 가급적 빨리 되기를 원한다”며 “미국 기업들이 한층 더 노력하지 않으면 뒤처질 것”이라고 밝혔다. 이렇게 되면 5G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고 관련 스마트폰 등의 세계 점유율을 높이고 있는 우리 기업들은 5G 투자비용을 제대로 회수하기도 전에 6G 기술 및 서비스 조기개발을 위해 또다시 대규모 투자를 단행해야 하는 부담을 떠안을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중국 역시 미국의 기술 견제와 부품·소프트웨어 공급 규제에 맞서 국산화 투자를 가속화한다면 우리 기업들은 중국 내수시장에서 입지가 한층 약화될 수 있다. 이미 미국과 중국은 기술 냉전을 본격화하기 전부터 서로 차세대 기술을 선점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대규모 연구개발(R&D)비를 쏟아붓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시대의 미중 무역전쟁을 분석한 이승주 중앙대 교수의 연구내용을 보면 지난 2017년 기준으로 미국과 중국의 R&D금액이 전 세계 R&D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26%(4,960억달러), 21%(4,080억달러)에 달해 거의 절반에 육박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전망에 따르면 중국의 투자액은 올해 5,000억달러를 넘어 2024년에는 6,000억달러에 육박할 것으로 보인다. 미중 두 나라가 거의 1조달러에 육박하는 자본을 투입하면서 경쟁적으로 ‘기술 만리장성’을 쌓으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국가 R&D 투자를 늘려 지난해 20조원을 돌파했지만 미중의 투자금액과 비교하면 아직 새 발의 피 수준이다. 우리나라가 단순히 R&D예산 규모를 늘리는 방식의 경쟁으로 미중을 추격하려 하다가는 ‘가랑이 찢어지는 뱁새’의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는 게 과학·기술 분야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따라서 R&D예산이 단순 행정예산 등으로 낭비되지 않도록 연구 관련 조직을 대대적으로 쇄신해 예산이 실질적으로 연구비에 쓰이도록 예산집행 구조를 고효율화해야 한다. 또한 출연연 주도에서 대학 주도의 산학연구로 기술혁신을 이끌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익명을 요청한 국책연기관 관계자는 “우리나라가 그동안 정부출연연구기관을 중심으로 산업기술 자립화에 성공해왔지만 보다 큰 금액을 투자하는 중국과의 경쟁 국면에서는 기존의 출연연 중심 연구구조로는 대응하기 어렵다”며 “미국처럼 대학이 R&D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진단했다.
아울러 미중의 기술 냉전은 IP의 자유로운 활용에도 장벽을 세울 수 있는 만큼 우리 기업과 관계 기관들이 핵심 IP를 선점하고 이를 기반으로 국내 시장을 테스트베드 삼아 혁신 서비스와 제품을 먼저 상용화할 수 있도록 규제 해소 정책에 고삐를 죄야 한다고 산업계는 내다봤다.
/민병권기자 newsroo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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