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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처, 9월의 독립운동가에 채원개 선정

광복군 지휘하며 조국독립에 헌신





국가보훈처·광복회·독립기념관이 ‘9월의 독립운동가’에 채원개(사진) 선생을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1895년 3월 24일 평안남도 영원에서 출생한 채원개는 개신교 계열의 의명소학교를 졸업하고, 21세에 조선보병대에 입대해 군인의 삶을 시작했다.

고향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됐으나 탈옥해 북만주로 이동하는 중에 유하현 삼원포에서 대한독립단 총단장인 조맹선을 만나 대한독립단 군사교관이 됐다.

1920년 일본이 독립군 세력을 대대적으로 토벌하자 그는 대한독립단 통임관구 지대장으로 열세인 병력과 물자로 일본군과 격돌해 관통상을 입기도 했다. 채원개는 1921년 통의부 대표로 김창환·심용준 등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파견돼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했고, 이후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했다.

1923년 6월 낙양군관학교 기병과에 입학해 체계적인 군사학을 배웠고, 중국 군벌의 내전에도 참여해 본격적인 실전 경험을 쌓았다. 1925년 임시정부 육군 참의부 군무부장에 임명돼 정의부와 참의부 간의 갈등을 해결하고자 만주로 건너가 지도자들을 만나 갈등을 봉합하고 중재했다.

1927년 황포군관학교 교관을 맡은 채원개는 제대로 된 군사양성 기관이 없이 무장투쟁하던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했다. 1934년 광둥 주재 중국군에 복무하면서도 한국독립당 광둥지부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했다.



광복군 제1지대원. /사진제공=보훈처


그는 중국 광저우 동산백원을 임시정부의 임시청사로 제공하고, 아세아여관을 임시정부 요인 및 가족들의 숙소로 활용하는 데 기여하는 등 임시정부를 측면에서 지원했다.

1940년 광복군에 합류해 참모처장, 1943년 총무처장 등을 역임하며 후방에서 지원 활동을 펼쳤다. 1944년 광복군 제1지대장을 맡는 등 전면에 나서 광복군을 지휘했다.

채원개는 광복 후 광복군 제1지대를 이끌고 귀국하려 했으나 미 군정이 광복군의 입국을 거절하고 개인 자격으로 입국만을 허락했다. 이 때문에 부대를 해체하고 부하들을 먼저 귀국시킨 뒤 이듬해 돌아왔다.

귀국 후 육군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마친 그는 제3연대 작전참모로 부임한 이후 제3여단장, 제2사단장을 역임한 뒤 1949년 준장으로 예편했으며, 1974년 2월 16일 별세했다.

정부는 채원개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김정욱기자 myk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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