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절대권력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이례적으로 남측에 사과의 뜻을 표했습니다. 외교가에서는 이번 김 위원장의 행보를 서해 연평도 공무원 피격 사망사건으로 정치적 위기에 처한 문재인 대통령 구하기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실제 문 대통령은 공무원 피격 사건에 대한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당시 아카펠라 공연을 관람한 사실이 공개돼 거센 비난에 직면했습다. 특히 문 대통령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세월호 대응 부실을 맹공했던 과거가 부메랑이 됐습니다.
박 전 대통령 탄핵으로 이뤄진 19대 대선에서 선의의 경쟁을 펼쳤던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대놓고 “대통령이 그토록 비판하던 (박 전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과 무엇이 다르냐”고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습니다.
정치적 위기에 빠진 문 대통령에게 김 위원장의 사과는 가뭄에 단비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청와대는 북측이 북한 노동당 중앙위 통일전선부 명의 통지문에 이어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 간 친서까지 공개하는 등 사태수습에 총력전을 펴는 모양새입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이 지난해 2월 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노딜’이라는 굴욕을 맛본 후 문 대통령을 냉대해 온 점을 고려할 때 이번 사과는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의 사과 배경에는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이 있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특히 북미 비핵화 협상의 키를 쥔 미 대선이 임박한 상황에서 발생한 이번 사건은 북한 입장에서도 부담이 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 대선은 김 위원장과 우호 관계를 과시하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24일(현지시간) 노스캐롤리아니로 이동하기 전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자신이 승리할 때에만 대선이 합법적이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즉답하지 않고 “우리는 (우편)투표용지에 매우 신중해야 한다. 이것은 완전한 대사기”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불복 가능성을 시사한 것으로 그만큼 현재 상황이 그만큼 나쁘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뉴욕타임스가 지난 16~22일 조사한 여론조사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은 그의 정치적 기반인 공화당의 텃밭으로 불리는 아이오와 텍사스주에서도 고전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바이든 후보는 아이오와주에서 45%의 지지율로 트럼프 대통령(42%)을 3%포인트 앞선 것으로 나왔습니다. 아이오와주는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9% 포인트 차로 승리한 지역인 만큼 트럼프 대통령이 받을 충격도 컸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비무장 민간인을 사살한 비인도적 사건이 미국 내에서 이슈화할 경우 김 위원장과 친분 관계를 과시한 트럼프 대통령은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비인도적인 범죄집단과 협상했다는 정적들의 공세를 받을 수밖에 없고 북미 협상은 대선 이후에도 먹구름이 드리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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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곤 한동대 북한학과 교수도 이 같은 미국 내 상황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박 교수는 “북한의 입장에서는 이번 공무원 피격 사건이 남한만 걸려있으면 과거처럼 사과를 안 했을 것”이라며 “해당 문제는 지금 미국도 연관된 문제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다음주 한국에 올 것으로 예상되는데 인도주의적 지원 확대 등 북한과 대한 대화 재개 방안도 논의될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습니다. 즉 공무원 피격 사건에 대한 대북 반감이 한미 조야에서 커질 경우 문재인 정부와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유화책은 ‘정치적 리스크’가 너무 커지게 됩니다.
김 위원장도 미 대선 이후 북미 비핵화 협상을 통해 대북제재 완화를 꾀해야 하는 만큼 이번 사태가 미칠 파장을 최소화 할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 김 위원장은 집권하며 인민들에게 경제발전에 따른 과실을 공언해왔습니다. 하지만 북미 비핵화 협상의 난항과 전염병 등으로 김 위원장의 경제성장 목표는 난관에 직면해 있습니다. 수령의 무오류성이라는 절대권력에도 불구하고 김 위원장이 경제성장 목표 미달에 대해 인정하고 수해현장을 직접 찾아 ‘애민(愛民)’ 지도자 이미지를 부각하는 것도 북한의 내부 사정이 얼마나 안 좋은지를 잘 보여줍니다.
김 위원장의 국정철학도 이번 사과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김 위원장은 과거 선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달리 ‘회의의 정상화’를 추구했습니다. 올해 김 위원장의 공개 행보 중 각종 회의 주재는 13회로 전체의 30%에 육박합니다. 이는 북한이 독재국가가 아닌 공식 회의체를 통해 정책 결정을 하는 정상국가임을 강조하기 위한 전략적 행보로 해석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비무장 민간인을 사법절차 없이 사살했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북한은 전 세계로부터 거센 비난에 직면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북한이 이례적으로 공무원 피격 사건에 대한 상세한 사건 개요를 설명한 것도 남한뿐 아니라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해명이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요.
/박우인기자 wipar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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