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은 기획재정부가 5일 발표한 ‘한국형 재정준칙’에 대해 △준칙성 △실효성 △시의성 등 주요 항목에서 큰 문제가 있다고 진단한다. 재정준칙을 준수하지 않아도 될 ‘심각할 경제위기’의 기준이 모호한데다 5년마다 관련 수치를 재설정하도록 한 점, 차기 정부 중반기인 오는 2025년 회계연도부터 준칙을 적용하게 한 점 등이 주요 문제로 지적된다. 고령화와 통일 관련 비용 등으로 향후 수년간 국가채무가 급증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재정준칙이 확장재정의 ‘브레이크’ 역할을 하기는커녕 들러리 신세에 머물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①그때그때 바꿀 수 있는 준칙
이날 기재부가 발표한 재정준칙의 첫 번째 문제는 준칙이 아닌 준칙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준칙 도입의 근거만 국가재정법에 담고 관련 준칙의 세부 수치는 시행령에 담는 꼼수를 택했다. 시행령은 국회를 거쳐 개정해야 하는 법령과 달리 소관 부처가 입법 예고 후 국무회의 의결을 통해 개정할 수 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수량적 한도를 시행령에 위임한다고 해서 법적 구속력이 없는 것은 아니며 법에 한도를 규정했을 경우 위기 시에 시간지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밝혔지만 정부의 의지에 따라 ‘고무줄 재정준칙’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반면 독일의 경우 구조적 재정적자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0.35% 이내로 유지하게 하는 재정운용 목표를 헌법에 규정해놓았다. 프랑스 또한 구조적 재정적자를 GDP의 0.5% 이내로 유지하도록 하는 내용을 법률로 규정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재정준칙이 없는 나라는 한국과 터키뿐이라는 점에서 이번 한국형 재정준칙은 도입 시기도 늦을뿐더러 여타 국가 대비 준칙성도 충족하지 못한 셈이다.
②이해할 수 없는 재정관리 공식
정부 재정이 준칙 한도를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마땅한 제재 방안이 없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정부는 이날 브리핑에서 “재정준칙 한도를 벗어날 경우 한도 이내로 조기 복귀될 수 있도록 지출혁신·세수대책·수지개선 등 다각적인 재정건전성 관리계획을 마련하도록 해 재정건전성 확보의 실효성을 보다 높이겠다”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재정준칙에 구멍이 많아 실효성에 물음표를 제기한다. 기재부는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이 60%를 넘지 않거나 통합재정수지가 -3%를 넘지 않을 경우 재정준칙을 준수한다고 정의했다. 기재부의 국가재정운용계획에 따르면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2024년 58.3%, 통합재정수지는 -3.9%를 각각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재정준칙이 본격적으로 적용되는 2025년에는 국가채무비율이 60%를 넘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통합재정수지를 -3% 밑으로 낮출 경우 재정준칙을 벗어나지 않는다. 둘 중 하나의 지표만 충족하면 된다는 점에서 정부 재량권이 너무 크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정부는 이 같은 우려를 감안해 ‘국가채무비율/60%×통합재정수지비율/-3%’이라는 공식을 만들어 해당 수치가 1을 넘지 않도록 관리하겠다고 했지만 이 또한 ‘안전판’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국가채무비율은 계속 누적되는 저량(stock) 개념이고 통합재정수지는 매해 갱신되는 유량(flow) 개념인데, 기재부는 이렇게 보완될 수 없는 서로 다른 성질의 수치를 하나의 공식으로 만들었다”며 “국가채무비율은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계속 상승할 수밖에 없고 통합재정수지는 경제 상황에 따라 해마다 추이가 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없는 공식”이라고 말했다.
실제 기재부의 관련 공식대로라면 국가채무비율이 120%라도 통합재정수지비율이 -1.5%만 넘지 않으면 관련 요건을 충족한다. 4차 추경 기준 올해 국가채무비율이 43.9%라는 점에서 정부 총수입에서 총지출을 뺀 통합재정수지가 -1.5%만 넘지 않으면 국가채무비율이 수년 내에 3배가량 급증해도 문제가 없는 셈이다. 특히 관련 공식대로라면 통합재정수지비율이 ‘플러스’를 기록할 경우 국가채무비율은 사실상 무한대로 늘릴 수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③경제위기 땐 면제 기준도 아리송
정부가 ‘심각한 경제위기 등에 해당할 경우 준칙 적용을 면제할 수 있다’며 채무비율 증가분을 향후 매년 25%씩 가산해 나간다고 밝힌 것도 논란이다. 심각한 경제위기의 기준이 불명확한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처럼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는 와중에 ‘면제 요건’이 너무 광범위하다는 지적이 제기될 수 있다. 경기둔화 시 통합재정수지 기준을 1%포인트 낮춘 -4%로 완화할 수 있다는 점도 ‘경기둔화’ 기준이 애매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차기 정부 집권 중반기인 2025년 회계연도부터 재정준칙을 적용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기재부가 차기 정부에 ‘재정건전화’라는 숙제를 떠넘긴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염명배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 부채가 현 정부 들어 빠르게 늘었다는 점에서 ‘결자해지’의 입장으로 재정건전성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이번 준칙은 되레 다음 정부부터 적용된다는 점에서 매우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든다”며 “코로나19처럼 예상하지 못한 위기가 닥쳤을 때를 감안해 예외조항을 넣는다 하더라도 재정을 어떻게 회복시킬지도 관련 준칙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세종=양철민기자 chop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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