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류’ 취급을 받던 중국산 게임이 달라졌다. ‘원신(原神)’ 같은 중국의 대작 모바일게임이 한국이나 일본에 뒤지지 않는 높은 퀄리티를 앞세워 한국은 물론 미국·일본 등 글로벌 시장에서도 위세를 떨치고 있다. 반면 한국 게임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사태 이후 꽉 막힌 수출길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내수용’으로 전락할 처지가 됐다.
9일 국내 구글플레이 스토어 게임 카테고리에서는 중국 미호요사의 오픈월드 어드벤처 게임 원신이 인기 2위, 매출 3위에 올랐다. 출시 이후 3위를 유지해온 ‘바람의나라:연(넥슨)’을 제쳤음은 물론 장기간 국내 모바일게임계의 제왕으로 군림해온 1·2위 ‘리니지M’ ‘리니지2M(엔씨소프트)’의 아성도 위협하고 있다. 이외에 7위 ‘기적의 검’, 10위 ‘라이즈 오브 킹덤즈’, 12위 ‘AFK 아레나’ 등 중국 게임 총 6개가 이날 국내 매출 20위권 안에 들었다. 원신은 콘텐츠 대국인 미국과 일본에서도 각각 매출 2위와 4위를 차지하며 글로벌 게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과거 중국 게임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것같이 천편일률적이라고 해서 ‘양산형’이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꾸준한 퍼블리싱(유통)으로 다져진 기반 위에 자체 지식재산권(IP) 개발에 공격적으로 투자하며 대형수출국의 반열에 올라섰다. 중국 자국 시장에서도 외산 게임에 대한 ‘판호(영업권)’ 발급 중단으로 자국 게임의 경쟁력을 높이며 ‘만리장성’을 쌓고 있다. 지난 2017년부터 신작 게임에 대한 판호를 받지 못한 한국 게임의 대중화권 수출 비중은 2017년 60.5%에서 2018년 46.5%로 급감했다.
여기에 게임 트렌드가 PC에서 모바일과 콘솔을 아우르는 ‘멀티플랫폼’으로 확장되고 있지만 국내 업계의 대응은 한발 늦었다는 평가다. 마이크로소프트(MS)가 최근 ‘엘더스크롤’과 ‘폴아웃’ 시리즈로 유명한 게임사 베데스다를 전격 인수하는 등 영토전쟁도 활발한 가운데 한국의 존재감은 미미하다. 국내 게임업계 안팎에서는 과거 PC 시절의 영광에 취해 글로벌 시장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한국 모바일게임은 오리지널 IP 부족에 과금 모델 개발에만 열중하는 악순환으로 국내 유저들의 냉담한 시선을 받고 있다.
/오지현기자 ohjh@sedaily.com
아이템 장사·콘텐츠 재탕에 ‘토종게임 외면’...韓, 수입국 신세로
[위기의 한국 게임산업]
中 양산형 벗어나 퀄리티까지 갖춰 양·질 모두 ‘레벨업’
韓은 中 수출길마저 막혀 4년간 매출 10조~17.5조 증발
K게임 최고라는 환상 깨어나 창의적 콘텐츠 개발 집중해야
게임 패러다임이 PC에서 중국의 주무대인 모바일로 옮겨가면서 꾸준히 시장 규모를 확대해온 중국의 개발력이 한국을 능가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여기에 과금 일변도 정책과 고객들의 눈길을 끌 만한 창의적인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점도 국내 게임산업의 발전을 막고 있다. 개발력마저 앞서버린 중국 게임에 대응하기 위해 이제는 콘텐츠산업의 본질에 집중해 빠르게 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9일 게임업계에 따르면 ‘원신’은 세계적으로 2,000만장 이상 판매된 닌텐도의 어드벤처 게임 ‘젤다의 전설-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에 버금가는 높은 퀄리티로 전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 중국산 양산형 모바일게임의 특징으로 여겨지던 자동사냥·자동진행 등 ‘방치형’ 플레이를 위한 기능은 찾아볼 수 없다. 수집형 롤플레잉게임(RPG) 특유의 BM(과금 모델)이 접목되기는 했지만 과금 없이도 게임 진행에 큰 무리가 없다는 게 중론이다. 세계 최대 콘텐츠 대국인 미국과 일본에서 각각 매출 2위, 4위에 이름을 올린 것도 원신의 경쟁력을 보여주는 증거다. 중국 게임이 게임성까지 갖춰 매출과 인기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는 것이다.
중국 모바일게임은 콘텐츠의 양과 질 모두에서 고도화를 이뤘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지난달 발간된 보고서에서 “중국 모바일게임은 지속적인 퍼블리싱(유통)과 더불어 자체 연구개발을 통해 정품 국산 지적재산권(IP)의 육성과 개발에 주력하는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중국 모바일게임 시장 규모는 지난 2014년 278억9,000만위안에서 올해 2,082억6,000만위안으로 6년 새 7.5배 성장했다. 모바일게임 성장에 힘입어 올 상반기 중국 제작 게임 매출은 1,201억4,000만위안을 기록해 전년 동기 대비 30.4% 급증했다.
반면 국내 주요 게임사들의 모바일게임은 ‘확률형 아이템’으로 대표되는 과금 일변도 정책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 엔씨소프트의 모바일 다중접속온라인롤플레잉게임(MMORPG) ‘리니지2M’은 올 4월 아이템 구성 대비 비싼 패키지 상품을 판매했다는 이유로 뭇매를 맞았다. 유저 커뮤니티에서 리니지 불매운동이 벌어지는 등의 해프닝 끝에 지난해 11월 출시 이후 줄곧 유지하던 구글 매출 1위 자리에서 밀려났다. 넥슨이 8월 출시한 신작 MMORPG ‘바람의나라:연’ 역시 ‘환수(펫) 뽑기’ ‘장비 강화·각인’ 등 게임 전반에 걸친 과금 콘텐츠로 유저들의 원성을 샀다.
오리지널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꾸준하다. 현재 국내 매출 상위권인 모바일게임들은 리니지·바람의나라·카트라이더·라그나로크 등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 나온 PC게임 기반이다. 같은 게임을 PC와 모바일·콘솔 등 다양한 기기에서 연결되게 플레이하는 ‘멀티플랫폼’ 트렌드와 달리 기존 PC게임을 모바일에 단순 이식하는 ‘IP 재탕’에 유저들의 피로감은 커지고 있다.
‘판호(영업권)’ 발급이 무기한 중단돼 중국 수출길이 막힌 상황에서 한국 게임계의 위기감은 고조되고 있다. 실적 기준으로 추산했을 때 판호 발급이 중단된 4년간 10조~17조5,000억원에 달하는 매출이 증발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처음에는 ‘짝퉁’ 게임에 불과하다는 색안경을 꼈는데 코스튬·모션·이펙트 등 모든 측면에서 퀄리티가 이미 한국을 초월했다고 본다”며 “중국은 한국의 수백배에 달하는 개발인력을 투입할 수 있어 차이가 점점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게임사 관계자도 “현재 국내 게임사 중 같은 기간에 원신 정도 되는 오픈월드 게임을 개발할 수 있는 곳이 있을지 의문이 든다”고 전했다.
전문가는 국내 게임업계의 생존을 위해 질 좋은 게임 콘텐츠라는 산업의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위정현 한국게임학회장은 “원신을 기점으로 한국의 게임 개발력이 최고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며 “재미라는 게임 본연의 가치에 집중해 경쟁력 있는 IP를 만들어 매출이 따라오는 구조가 돼야지 초기 유저를 쥐어짜는 방식으로 돈을 뽑아내는 구조는 악순환을 부를 뿐”이라고 강조했다.
/오지현기자 ohjh@sedaily.com
‘황금기’ 콘솔게임 시장도 美·日 잔치
[위기의 한국 게임산업]
소니 ‘PS5’ 2차 예약 1시간만에 매진
MS ‘엑스박스 시리즈 X’등도 완판
‘콘솔용 게임’ 히트작 국산은 전무
새 트렌드 구독 서비스도 지지부진
콘솔게임 시장이 황금기를 맞고 있지만 국내 게임업계는 소외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콘솔게임은 물론 클라우드게임 등 게임 시장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지만 이미 국내 게임 시장을 점령한 외산 게임들로 인해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다.
9일 게임업계에 따르면 지난 7일 소니의 차세대 게임 콘솔인 ‘플레이스테이션5(PS5)’가 1차에 이어 2차 예약판매에서도 1시간여 만에 매진됐다. 앞서 마이크로소프트(MS)의 차세대 콘솔 ‘엑스박스 시리즈 X’와 ‘시리즈 S’도 지난달 22일 사전예약을 시작하자마자 매진됐다.
콘솔게임기의 연이은 매진 행렬에 국내 게임 시장에 콘솔의 ‘황금기’가 올 것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실제로 PC와 모바일게임 위주의 한국 시장에서도 최근 콘솔게임 시장의 성장세가 가파르다. 국내 콘솔게임 매출액은 2017년 3,734억원에서 2018년 5,285억원 규모로 1년 만에 40% 넘는 성장률을 보였다.
하지만 국내 게임업계는 축배를 들지 못하고 있다. 일부 게임사들이 뒤늦게 콘솔게임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지금까지 글로벌 콘솔게임 히트작 중 국산 게임은 전무하다. 엔씨소프트·펄어비스 등이 AAA급 콘솔 타이틀 출시를 준비하고 있지만 철옹성 같은 외산 게임들을 넘어설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여기에 콘솔게임을 클라우드에 접목한 게임 구독 서비스가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는 가운데 한국은 이동통신사 주도로 유통망을 제공하는 데 그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실제로 최근 MS는 ‘엘더스크롤’ ‘폴아웃’ ‘둠’ ‘울펜슈타인’ 등 다수의 히트작을 개발한 게임사인 베데스다소프트웍스의 모회사 제니맥스미디어를 약 8조7,000억원에 인수했다. 이미 22개의 게임 스튜디오를 거느린 MS가 베데스다를 인수한 이유는 자사 게임 구독 서비스 ‘엑스박스 게임 패스’의 성공적 안착을 위해서다. 넷플릭스처럼 콘텐츠 확보에 따라 성패가 갈리는 구독형 서비스 특성상 독점 콘텐츠 확보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조성한 생태계에서 일부 국내 게임업체들이 콘솔용 게임을 출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뒤늦은 대응이라는 평가다.
한 국내 게임업계 관계자는 “최근 MS가 베데스다를 인수한 것을 보고 열패감이 들었다”며 “이미 글로벌 게임계에서는 인수합병으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지각변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한국은 홀로 동떨어져 있는 시장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노현섭·오지현기자 hit8129@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