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은 ‘2015 중국 방문의 해’ 개막식 축하메시지에서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의 시 ‘호중별천(壺中別天·호리병 속 별천지)’을 인용해 한반도의 아름다움을 극찬했다. 시구 속에 등장하는 곳은 경남 하동. 이를 계기로 한동안 하동이 중화권 관광객들에게 큰 주목을 받았다. 그보다 먼저 하동을 여행지로 알린 건 아무래도 가수 조영남의 ‘화개장터’일 것이다. ‘구경 한번 와보세요~’라는 노랫말처럼 한동안 하동에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50대 이상의 머릿속에 하동은 큰 장터로 대표되는 고장으로 각인됐다.
지금 하동의 자랑은 시 주석의 ‘호중별천’이나 가수 조영남의 ‘화개장터’가 아니라 ‘트로트 신동’ 정동원이다. 정동원의 고향인 하동은 지난 5월 그의 이름을 딴 7.2㎞ 길이의 ‘정동원길’을 조성했는데, 최연소 인물 지정길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될 예정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종식되지 않은 와중이지만 정동원의 집 근처에는 관광객들로 북적인다고 한다. 트로트 팬이 아니라도, 아름다운 풍광만으로 여행객의 발길을 사로잡는 하동에 다녀왔다.
출발은 녹차밭이다. 하동은 우리나라에서 녹차를 처음 재배하기 시작한 시배지다. 828년(신라 흥덕왕 3) 하동군 화개면에 당나라에서 들여온 차나무 씨앗이 뿌려진 후 1,200년 가까이 녹차를 재배하고 있다. 처음 차밭이 조성된 곳은 화개장터가 있는 화개면 일대. 지리산 자락에 뿌려진 씨앗은 주변으로 퍼져나가면서 야생차 군락을 이뤘다. 그 중심이 화개면 정금차밭이다. 화개장터를 지나 굽이굽이 고갯길을 따라 한참을 더 올라가야 나오는 산골마을 정금리에서는 지금도 주민 대부분이 논밭 대신 대를 이어 차밭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다.
최근 하동군은 정금리 일대 50만㎡(15만여평)의 차밭을 관광휴양형 다원(茶園)으로 가꾸어 천년차밭길을 조성했다. 지난해 전통 차농업 세계중요농업유산 등재를 기념해 차 시배지 일원을 걷기명소로 키우고자 조성한 탐방로다. 천년차밭길은 정금차밭에서 신촌차밭을 거쳐 쌍계사 인근 차 시배지로 이어지는 총 2.7㎞ 구간으로 야생차밭을 조망하면서 심신을 정화하는 힐링코스다. 마을 입구에 차를 세워두고 야생 차밭을 풍경 삼아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20분쯤 걸어 올라가면 언덕 위에 정금정이 나온다. 정자 위에 올라서면 산비탈에 구불구불 고랑을 따라 가지런히 줄지어 늘어선 차밭과 저 멀리 섬진강과 화개천이 만나는 곳에 자리한 화개장터가 한눈에 들어온다.
하동 녹차는 다습하고 일교차가 커 차 재배지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때문에 예로부터 화개차는 조정에 진상품으로 공납돼 ‘왕의 차’로 불렸다. 하동에서는 현재 2,000여 농가가 차를 생산하는데, 이곳에서 나오는 차 브랜드만 300개에 달한다고 한다. 모두 전통방식을 고수하고 있지만 녹차부터 홍차·블랜딩차까지 다양한 차를 선보이고 있고, 사람마다 제다(製茶) 방식에 차이가 있어 각기 다른 맛을 낸다. 이 마을에서는 수확철인 봄을 제외하고는 농가마다 운영 중인 다실에서 차의 역사와 제다법 등을 들으며 여유롭게 천년차밭에서 수확한 다양한 차를 맛볼 수 있다. 천년차밭길을 가기 전 마을 입구 다실에서 다도용 피크닉 세트를 대여해 차마실을 다니는 것도 천년차밭길을 즐기는 색다른 방법이다.
전통차로 마음이 차분해졌다면 다음은 하동의 절경을 감상할 차례다. 화개면에서 섬진강을 따라 남쪽으로 한참을 내려가다 보면 그 유명한 최참판댁이 있는 악양면 평사리가 나온다. 평사리 고소산 정상에 세워진 스타웨이는 지난해 9월 문을 연 전망대다. 산비탈에 기둥을 세워 그 위에 별 모양의 커다란 구조물을 설치했는데, 박경리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270㎡(83만여평)의 평사리 들판과 굽이치는 섬진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최적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맑은 날에는 저 멀리 광양의 백운산까지 조망할 수 있을 만큼 탁 트인 시야를 자랑한다. 섬진강 수면으로부터 150m 상공 위에 자리한 만큼 평소에도 강한 바람이 불고, 중간중간 바닥에 유리를 설치해 짜릿함을 더한다. 고소공포증이 있다면 스타웨이 전망대 커피숍에서 여유롭게 노을이 지는 풍경을 감상하는 것도 좋다.
정동원길이 시작되는 진교면에서 금남면으로 넘어가는 길목에는 금오산이 자리하고 있다. 해발 849m 높이의 금오산 정상 해맞이공원은 하동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또 다른 명소다. 금오산 등산로는 총 3.8㎞로 차를 타고도 쉬지 않고 20분을 달려야 도달할 수 있을 만큼 멀고 험하다. 힘들여 산을 오르는 것은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 때문이다. 하동을 내려다볼 수 있는 북쪽은 공군 레이더기지로 막혀 있지만, 남쪽은 남해 바다 전체가 시야에 들어올 만큼 조망이 좋아 새해 첫날 해돋이를 보러 많은 이들이 찾는다. 남해·여수·광양 일대와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하동과 남해 사이 노량 앞바다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격전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아쉽다면 정상 인근 ‘하동 짚와이어’를 이용해보는 것도 좋다. 아시아 최장인 3,186m 길이로 금오산 정상에서 출발해 산 아래 매표소까지 5분이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하강한다. 최근 한 방송 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연말까지 예약이 꽉 찼다고 한다. 꼭 짚와이어를 타지 않더라도 금오산 정상에서 다도해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만큼 비경을 자랑한다.
밤에는 평사리 백사장에서 달마중 프로그램이 열린다. 섬진강 백사장에서 보름달 아래 호롱불을 들고 달마중을 하고, 섬진강에 소원을 적은 종이배도 띄워본다. 모래밭에 담요를 깔고 앉아 ‘호리병 속 별천지’라는 말처럼 쏟아질 듯한 별을 보며 시낭송과 음악을 감상하기도 하고, 미리 준비된 따뜻한 차를 마실 수 있다. 보름달이 뜨지 않거나 구름에 달이 가렸더라도 상관없다. 백사장에는 달 모양의 대형 조형물이 설치돼 1년 365일 주위를 환하게 비춘다. 한국관광공사 ‘야간관광 100선’에 선정된 곳으로 하동여행을 마무리하기에 좋다.
/글·사진(하동)=최성욱기자 secret@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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