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와 자라의 스펙터클 추격전이 무대를 점령했다. 용왕님 살릴 명약을 찾아 뭍으로 나온 자라와 자라를 피해 제 목숨(간) 지키려는 토끼의 한 판을 담은 판소리 ‘수궁가’ 이야기다.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적벽가와 함께 판소리 다섯 바탕을 구성하는 수궁가는 재치있는 소리와 풍자가 매력이다. 최근 얼터너티브 팝 밴드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 신드롬과 함께 다시금 주목받은 수궁가가 오리지널 판소리부터 무용·창극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변주와 함께 관객을 찾아온다.
오는 21일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열리는 ‘김수연의 수궁가’ 공연은 판소리 수궁가의 참맛을 만끽할 기회다. 최근 판소리 수궁가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 예고되기도 한 김 명창은 스승 박초월 명창에게 직접 배운 미산제 수궁가를 완창한다. 미산제 수궁가는 송흥록-송광록-송우룡-유성준-정광수-박초월로 이어져 왔으며, 상·하청을 넘나드는 음과 화려한 시김새가 돋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수궁가의 여러 유파 중에서도 서민적인 정서와 자연스러운 소리가 잘 녹아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 명창은 “수궁가는 인간사 충(忠)을 다룬 귀한 소리”라며 “우리 삶에 지혜와 위안을 건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완창 무대에 서려 한다”고 말했다.
몸짓으로 풀어낸 수궁가도 기다리고 있다. 오는 15일 온라인에서 공개되는 움직임팩토리의 ‘물속:속물’이다. 제23회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국내 프로그램으로 선보이는 이 공연은 수궁가를 각색해 계급 사회의 이면을 고발한다. 권력 아래 고통받는 소시민의 모습을 토끼와 용왕의 이야기로 유머러스하게 표현했다. 현대적이면서도 한국적인 무용극을 추구하는 움직임팩토리의 매력적인 공연은 15일 저녁 8시부터 24시간 동안 유튜브와 네이버 TV를 통해 볼 수 있다.
국립창극단도 내년 6월 개막을 목표로 신작 ‘귀토(가제)’를 제작한다. 귀토는 수궁가의 근원설화인 귀토설화를 바탕으로 한다. 이번 공연에서 작창은 물론 작곡과 음악감독까지 맡은 한승석은 “귀토설화는 이 시대의 권력자 문제나 젊은이들이 처한 상황 등 현실 비유를 담은 내용이 많아 재창조 작업이 흥미롭다”고 기대감을 표했다.
수궁가의 이 같은 변주는 작품의 단편화된 구조와 스토리의 동시대성에서 비롯된다는 분석이다. 수궁가는 판소리 다섯 마당의 다른 작품들처럼 하나의 주제가 이야기를 관통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국립국악원 국악연구실장을 지낸 김희선 국민대 교양학부 교수는 “수궁가는 용궁, 뭍, 호랑이와의 만남 등 짤막한 이야기가 합쳐진 에피소드 형식”이라며 “전체 맥락을 모른 채 특정 토막만 들어도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변주와 확장에 용이한 지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날치의 정규앨범 1집은 수궁가 중 10개 대목을 골라 만들었는데, 한 판소리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이야기의 내용이 풍성하다.
스토리의 동시대성도 빼놓을 수 없다. 수궁가는 용왕을 향한 신하들의 과도한 충성을 통해 당시 정치를 풍자한다. 계급사회, 사내정치, 갑질 횡포… 언제 들어도 ‘당대의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는 요소들은 ‘그 시대의 세태를 담는 그릇’이 된다. 김 교수는 “등장인물부터 전체 이야기가 동시대성을 갖기에 관객들의 공감을 살 수 있고, 그래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고 확장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일상과 맞닿은 이야기를 반전과 위트를 버무려 쉽고 재밌게 풀어내고, 우화 형식으로 인간군상을 재치있게 다룬다는 점에서 대중의 기호에 맞아떨어진다는 분석이다.
/송주희기자 sso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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