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위해 8,000억원을 지원하기로 한 산업은행이 대한항공의 모회사인 한진칼에 사외이사 지명권, 주요 경영 사안에 대한 사전협의 등 7대 의무를 부과했다. 한진칼이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5,000억원의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번 인수로 경영권 분쟁을 겪고 있는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의 경영권 방어가 가능졌다는 논란을 의식해 산은이 감시·통제 권한을 강화한 것으로 풀이된다.
17일 금융권에 따르면 산은은 한진칼에 8,000억원을 투자하는 계약을 체결하면서 투자합의서에 ‘한진칼의 산은에 대한 의무’ 7대 조항을 명시했다. 7대 의무조항은 대한항공의 아시아나 인수를 위해 산은의 감시·관리 권한을 강화하고 한진칼이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위약금 5,000억원을 물고 손해배상책임을 부담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우선 산은은 대한항공의 아시아나 인수 작업에 적극적으로 관여할 장치를 의무조항으로 마련했다. 한진칼은 산은이 지명하는 사외이사 3인과 감사위원회 위원을 선임해야 한다. 현재 한진칼 이사진은 조 회장, 석태수 사장, 하은용 부사장 등 사내이사 3명과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등 사외이사 8명 등 11명으로 구성돼 있다. 또 한진칼은 주요 경영사항에 대해 산은과 사전협의를 해야 하고 동의를 받아야 한다.
한진그룹 오너 일가의 리스크를 감시하기 위한 독립기구인 윤리경영위원회와 경영평가위원회도 설치해야 한다. 해당 위원회는 한진칼의 경영 현황을 주기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해 의견을 내는 방식으로 운영될 것으로 보인다. 앞서 최대현 산은 부행장은 전날 온라인 브리핑을 통해 “매년 한진칼의 경영을 평가해 평가등급이 저조할 시 경영진 해임과 교체 등의 조치를 취할 예정”이라며 “통합에 실패할 경우 조 회장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항공 주식 등에 대한 담보 제공과 처분 제한에 관련한 조항도 마련됐다. 조 회장은 자신이 보유한 한진칼 지분(6.52%)과 대한항공 지분을 담보로 제공했다. 아시아나항공에 대한 인수 후 통합(PMI) 계획을 수립하고 이행할 책임도 부여됐다. 한진칼은 마지막 일곱 번째 의무조항으로 투자합의서의 조항들을 위반할 경우 5,000억원의 위약금을 부담하기로 했다. 산은은 이에 대한 담보로 대한항공 발행 신주에 대한 처분권한도 가져갔다. 산은 측은 “산은이 오너 및 경영진의 책임경영 의지를 이끌어내고 건전경영이 이뤄지도록 감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산은이 한진칼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민 이유는 무엇일까.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인수로 인한 특혜 시비 논란을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된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측과 KCGI 등 3자 연합이 한진칼 경영권 확보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책은행이 나랏돈으로 조 회장의 경영권 방어에 나섰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장치로 원활한 인수 추진을 위해 경영과 오너 일가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는 한편 항공산업 재편에 힘을 싣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는 분석이다.
특히 지난해 3월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의 딜 당시 산은이 현대중공업에 사외이사 1인 추천권, 주식 처분 제한 등의 의무만을 부과했던 점과 비교해도 의무조항이 많다. 한진그룹 오너 일가가 그동안 ‘땅콩 회항’ ‘물컵 갑질’ 등의 사건으로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만큼 오너가에 대한 감시·통제 장치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동걸 산은 회장 역시 전날 온라인 브리핑에서 “국적항공사가 지니게 될 국가 경제 및 국민 편익, 안전 측면에서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며 “경영평가위원회·윤리경영위원회 등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통해 한진그룹은 책임경영을, 산업은행은 건전경영 감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나가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한진그룹 경영권에 대한 논란은 여전하다. 이번 인수 추진으로 조 회장의 경영권 방어가 가능해졌다는 분석 때문이다. 현재 한진칼 지분은 조 회장 측이 41.4%를, KCGI와 반도건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등 3자 연합이 46.71%를 갖고 있다. 산은이 한진칼 유상증자에 참여하면 한진칼 3대 주주가 된다. 이렇게 되면 산은이 투자 합의의 실질적인 상대인 조 회장 편에 설 가능성도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지윤기자 luc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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