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오전10시 신분당선 판교역. 광교행 열차의 문이 열리자 한꺼번에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회사를 향해 1번과 4번 출구로 종종걸음을 하는 인파 사이로 ‘개발자’ ‘채용’ ‘상시모집’ 등의 문구가 걸린 구인광고가 속속 눈에 띄었다. 에스컬레이터 옆 벽면도, 역사 내 기둥도 대부분 ICT 기업들의 개발자 채용 광고 차지였다. 출근을 재촉하는 직장인들이 기둥에 붙은 채용공고를 힐끗 보며 지나치는 가운데 아예 멈춰서 꼼꼼히 광고 문구를 읽는 사람도 있었다. 판교역 광고 담당자는 “23일부터는 네이버 경력 개발자 채용광고가 설치된다”며 “한 기업의 채용광고 게재가 끝나면 바로 다음날 다른 기업의 채용광고가 붙을 정도로 구인광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불과 어제까지는 판교역 1번 출구를 이용해 퇴근했다가 다음 날부터 다른 출구를 통해 출근하는 판교 직장인의 삶을 보여주는 풍경이다. 네이버·카카오(035720)·엔씨소프트(036570) 등 한국을 대표하는 정보통신기술(ICT) 기업들이 몰려 있는 판교는 ‘한국의 실리콘밸리’로 불린다. 한국을 대표하는 ICT 인재들이 모이는 ‘판교밸리’에서조차 기업들이 오프라인으로까지 구인광고를 내고 다른 기업의 인재를 웃돈을 주고 데려오는 일도 서슴지 않는 치열한 ‘인재 구하기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AI는 한 달이면 두세발짝 앞설 수준"... 인재 찾는 사이 도태될까 불안감 |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는 2018년 오는 2023년까지 DNA 산업에서 부족한 인재가 3만8,000여명에 달할 것으로 예측했다. 불과 2년이 지난 현재 각 분야의 DNA 산업이 본격 성장하면서 기업들이 체감하는 인재부족 현상은 이보다 훨씬 심각하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비대면 분야의 사업기회가 폭발적으로 열리고 있어 신사업에 나서려는 기업들의 인재 구하기 전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과 비교해도 국내 인공지능(AI) 개발자 인력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기업 경쟁력 측면에서 인력 확보가 중요한데 뽑고 싶어도 뽑을 개발자가 없습니다.”(한성숙 네이버 대표)
“데이터를 이해하고 가공·분석·적용할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데이터 처리 관련 인력을 보강하지 않으면 너무 힘든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여민수 카카오 대표)
네이버의 한성숙 대표와 카카오의 여민수 대표는 지난 12일 국무총리 서울공관에서 열린 ‘목요대화’ 때 정세균 국무총리를 만나 업계의 가장 필요한 현안에 대해 말해보라고 하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인재가 부족하다고 입을 모았다. 국내 ‘정보통신기술(ICT) 업계 투톱’으로 불리는 두 회사의 대표가 국무총리에게 건의한 가장 큰 과제는 규제 완화나 진흥정책이 아닌 바로 인재부족이었다. ICT 관련 기업 종사자들은 물론 취업준비생들도 이직 및 취업 1·2순위로 꼽는 네이버와 카카오마저 이 정도로 인력난에 허덕이고 있는 것이다.
공채 사라진지 오래됐는데 ... 개발자는 대규모 공채 |
해외 학회 갈 때마다 대학에 눈도장 찍는 기업들 |
기업 인지도가 떨어지고 인재 영입을 위한 ‘실탄’이 부족한 스타트업이나 중소 규모의 ICT 기업들은 경쟁이 더 치열하다. 쿠팡은 7월 경력 개발자 200명을 공개채용하면서 ‘사이닝 보너스 5,000만원’을 지급하겠다고 공고해 화제를 모았다. 토스·뱅크샐러드 등 대규모 투자를 유치한 핀테크 스타트업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근무한 개발자들을 리더급으로 영입하면서 ‘묻지 마 연봉’을 지급했다. 벤처캐피털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 등 대기업에서도 눈독을 들였는데도 실리콘밸리 출신 개발자들이 핀테크 기업을 선택한 것은 연봉이나 처우가 대기업 임원급 이상이거나 스톡옵션 등 다양한 옵션을 붙였기 때문”이라며 “우수한 개발인력 영입경쟁에서 이기려면 파격적인 연봉 외에 회사의 비전이나 성장 가능성 등에 대해서도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공감대를 얻어야 한다”고 전했다. 한 스타트업 대표는 “인재를 채용할 때 회사 대표가 지원자에게 회사에 대해 어필하는 ‘역면접’을 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며 “투자유치뿐 아니라 인재유치도 대표의 능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일부 기업들은 기업 간 협력으로 자구책 마련에 나섰다. 카카오·삼성전자·SK텔레콤은 AI 협의체를 출범시켰고 KT 역시 KAIST·한양대 등과 ‘AI 원팀’을 맺고 개발인력 양성을 위한 협력을 진행하고 있다. 네이버도 네이버 커넥트재단에서 ‘부스트 캠프’를 진행하기 위해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교육·컨설팅 전문 스타트업인 ‘업스테이지’와 손을 잡았다. 이활석 업스테이지 최고기술책임자(CTO)는 “AI 기술의 경우 이론이 검증받기까지 사이클이 한 달에 불과할 정도로 변화가 빠르다”며 “당장 현장에서 AI로 문제를 풀어낼 수 있도록 개발자들을 양성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정혜진기자 made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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