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가 산정 서세옥(사진)이 숙환으로 지난달 29일 별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향년 91세.
대한민국예술원은 3일 공지사항을 통해 “대한민국예술원 미술분과 서세옥 회원께서 2020년 11월 29일 숙환으로 별세하셨다”면서 “유족은 조문객의 코로나19 방역 차원에서 가족장으로 장례 후 별세 사실을 알려드리게 됨을 양해 바란다”고 밝혔다.
1929년 대구에서 태어난 서세옥의 아버지는 한학자 서장환(1890~1970)으로 독립운동과 의병가족지원을 위한 자금줄 역할을 한 항일지사였다. 어린 시절 서세옥은 산더미 같은 한문서적에 둘러싸여 살았고 자나 깨나 책만 읽었다고 한다. 해방 이후 그는 “흥분과 감격이 환멸로 바뀌는 과정에서 ‘내가 가진 재주가 아무 것도 아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문학으로 등단하려 고심했으나 “문학이란 언어의 부호인 문자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자유가 없다. 문자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는 깨달음에 미술로 진로를 돌렸다. 마침 1946년에 설립된 서울대 미술학부에 제 1회생으로 입학한 서세옥은 당시 동양화과 교수를 지낸 근원 김용준(1904~1967)의 전통 미술 교육과 묵법 화풍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서세옥은 대학 4학년이던 1949년에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출품해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당시 국내 동양화단은 가는 윤곽선으로 형태를 그리고 짙게 채색하는 일본화풍이 지배적이었고, 일본풍 미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자각이 컸다. 서세옥은 먹으로 그리되 과거 문인화를 답습하지 않았고 간결한 선묘, 담채에 의한 담백한 공간 처리 등을 거쳐 파격적인 수묵 추상으로 독창적 화풍을 개척했다. 당시 서양화단은 앵포르멜(예술가의 즉흥적 행위와 격정적 표현을 중시한 전후 유럽의 추상미술 경향)의 자극을 받아 아방가르드 운동이 조짐을 보일 때였다. 동양화가인 서세옥은 헝겊에 솜방망이로 먹을 두들기거나 나무판에 석고를 발라 칼로 긁는 그림 등 ‘그리는 행위’에 대한 근원적 문제 제기를 했다.
1960년에는 전위적 예술가그룹인 ‘묵림회(墨林會)’를 결성했다. 친일 청산의 의지를 담아 국전 참가 거부와 함께 동양화 혁신운동을 펼친 그는 ‘국전개혁위원장’으로 위촉됐고 비구상 부문을 신설해 실험적인 작품을 위한 등용문을 열어줬다. 작가는 1970년대 후반부터 오직 먹 묻은 붓 하나로, 오로지 선과 점만으로 사람의 형상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특히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해서는 ‘손에 손잡고’ 하나 된 사람들의 화합과 희열의 몸짓을 보여주는 이 같은 군상을 다수 남겼다.
“화가도 인간이다. 인간에 흥미를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인간 형상을 다각적으로 표현한다. 외톨박이가 있고, 함께 울고 웃는 사람도 있다. 어머니가 아이를 품고 있는 모자상도 있다. 어머니의 탯줄을 자르고 나서는 혼자 돌아다니며 뿌리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어머니는 우리 정신의 ‘집’이다.…때로는 몸통은 사라지고 인간이라는 껍데기만 남긴 작품도 있다. 수많은 인류의 희로애락을 표현한 것이다.”
서울대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면서도 서세옥은 한국미술의 국제화 흐름에 앞장서 상파울루비엔날레, 카뉴국제회화제 등에서 활약했다. 1993년 국민훈장 석류장, 2005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06년 제4회 이동훈미술상, 2007년 대한민국예술원상, 2010년 한국미술협회 대한민국미술인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2008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됐고, 2009년 개관한 성북구립미술관 명예관장으로 활동했으며 2012년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2014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 작품 100점을 기증해 기념전이 열렸다.
탁월한 통찰력과 깊은 철학적 사유를 대물림했다. 그의 장남 서도호는 공간과 인간의 관계를 모색해 천과 실로 만든 ‘집’ 설치작품이나 다양한 재료로 표현한 군상 등으로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다. 서세옥의 차남인 서을호는 건축가다. 두 아들이 함께 세계 최고 권위의 국제예술제인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에 한국관 대표작가로 참여했고, 광주비엔날레 공동프로젝트로 참가하며 아버지의 빛나는 이름을 이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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