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 대의 화학 시설을 가동하는 A사 대표는 제품 생산이나 품질 개선보다 정부의 ‘검사’에 대비하느라 보내는 시간이 더 많다.
매주 시설에 대한 자체 점검을 실시해 그 결과를 기록·보관하고 외부 검사기관으로부터 매년 정기 검사를, 4년마다 안전 진단을 받아야 한다. 신규 설치 시설에 대해서는 설치 검사도 받는다. A사 대표는 7일 “사고 예방이나 안전 관리는 뒷전이고 검사에 필요한 서류 준비에 시간을 다 보낸다”고 토로했다.
기업들이 겹겹이 쌓이는 규제에 시름하고 있다. 정부·여당은 기업들의 호소를 외면하고 기업 현실을 무시한 채 기업들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규제 법안과 정책들을 줄줄이 쏟아내고 있다. 일부 법안에는 사업주에 대한 강도 높은 형사 처벌 규정까지 포함돼 있어 “기업을 경영하려면 감옥에 갈 각오까지 해야 할 판”이라는 탄식도 흘러나온다. 이에 서울경제신문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탄소 중립 등 기업들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주요 법안과 정책의 문제점에 대해 짚어본다.
재해 원인 다양한데 업종·현장 고려 않고 일방적 처벌
‘세계 최고 수준’ 산안법 이어 추가 규제…법규정도 모호
사고 방지 대신 엄벌만 외쳐…안전수칙 등 예방조치 외면
국회에서 잇달아 발의되고 있는 중대재해법을 두고 경제계는 “모든 기업인을 잠재적 범죄자 신분으로 만드는 것 아니냐”며 망연자실하고 있다. 산업재해 사고는 복합적인 원인에 의해 일어나는데 중대재해법은 그 책임을 오로지 사업주에게 전가함으로써 이들이 최선의 노력을 하더라도 처벌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재계는 업종과 현장을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법안이 최고경영자(CEO)의 공포감을 극대화하고 기업 경영을 심각하게 위축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현재 국회에 발의된 중대재해법은 모두 사업주와 경영 책임자가 안전 의무를 위반해 누군가 사망에 이르는 경우 하한형을 둔 형사 처벌을 받게 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강은미 정의당 원내대표 발의안은 3년 이상 징역 또는 5,000만원 이상 10억원 이하의 벌금을, 이탄희·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안은 2년 이상 징역 또는 5억원 이상 벌금을, 임이자 국민의힘 의원안은 5년 이상 징역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도록 하고 있다.
이처럼 사업주에 강한 처벌을 부과하는 중대재해법에 대해 기업들은 ‘지나친 규제 만능주의’라고 호소하고 있다. 김용근 한국경영자총협회 상근부회장은 지난 2일 ‘산재예방 선진화를 위한 입법과제 토론회’에서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도 세계 최고 수준의 형벌을 규정하고 있는데 더해 중대재해법은 형량도 기계적으로 상향했을 뿐만 아니라 하한선까지 설정해 이제 CEO들은 공포감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기존 산안법은 근로자 사망 시 사업주에 ‘7년 이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 벌금’이라는 무거운 처벌을 규정하고 있다. 반면 영국·싱가포르는 2년 이하 금고, 독일·프랑스·캐나다는 1년 이하 징역, 미국·일본은 6개월 이하 징역에 그친다. 여기에 중대재해법안까지 적용하는 것은 헌법상 ‘과잉금지 원칙’에 위배되고 되레 사업주의 능동적인 안전 경영 추진을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다.
원청 및 하청 업체 간 역할과 책임을 구분하지 않고 원청 경영 책임자에게도 하청에 대한 위험 방지 의무를 함께 부여하고 사고의 책임을 묻는 것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기업이 생산 과정에서 외부 인력을 활용하는 것은 보편적인 글로벌 경영 전략인데 이 같은 처벌 규정은 원청에 지나친 부담을 안기며 사실상 외주를 제한하는 조치라는 것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제3자에게 임대·용역을 한 경우에도 공동으로 책임을 묻는 것은 규제 대상을 과도하게 확대해 외주화가 불가능해진다고 봐야 한다”며 “기업들의 경영상 선택의 자유를 극도로 축소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업주의 처벌을 목적에 둔 법안이 사업장 내 중대 사고를 실질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지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최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가 개최한 공청회에서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처벌 규정을 대폭 강화한 산안법 개정안이 통과됐지만 건설업 재해는 되레 20% 증가했다”며 엄벌로만 다스리는 것은 효과가 없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인 예방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처벌만 강화하는 것은 긍정적 효과를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법인과 사업주에 대한 처벌을 강화할 것이 아니라 근로자들이 현장에서 안전 수칙을 더 철저히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관리시스템 등 사고를 예방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능현·전희윤 기자 nhkimch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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