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 ‘젠가’에선 블록을 쌓은 기둥을 무너뜨리는 사람이 진다. 블록을 하나씩 빼서 맨 위에 얹는 걸 반복하다 보면 기초가 부실해지고, 언제 무너질지 모를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다가 결국 박살난다. 조직도 비슷하다. 처음엔 작은 구멍에서 시작된 부조리가 커지면 조직 전체를 무너뜨리게 된다. 이를 조용히 수습하려고 갖은 수를 쓰다가도 대책이 없으면 무너지는 건 순간이다. 일간지 기자 출신 소설가 정진영의 신작 ‘젠가’가 전하는 목소리도 비슷하다. 그는 최근 방송을 시작한 JTBC 드라마 ‘허쉬’의 원작 소설을 쓰기도 했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고진이라는 가상의 중소도시에 자리한 가상의 대기업 계열사를 배경으로 하나의 큰 부조리극을 펼친다.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지만 작은 문제점과 부조리에 조직이 붕괴하는 과정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경영지원팀의 남성 차장은 위계를 이용해 신입 여성 직원을 성추행했다가 자택대기발령을 받고, 회사에 복귀하기 위해 선배의 부탁으로 뒷조사를 벌인다. 뒷조사를 부탁했던 선배는 임원 승진에서 누락될 것이 확실해지자 이렇게 얻은 회사의 약점을 이용해 임원들과 ‘딜’을 하려 한다. 이 약점이 지역 일간지의 한 젊은 기자에게 알려져서 기사화가 예상되자 기업은 술자리와 각종 광고, 협찬을 통해 무마를 시도한다.
이 외에도 인물들의 여러 가지 부조리함이 작품을 오간다. 등장 인물은 모두 선악이 확실한 구분이 없는, 입체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각자가 살아남으려 악다구니를 쓰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1만3,500원.
/박준호기자 violato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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