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4차례의 대책을 내놓아도 집값을 잡지 못하는 것은 부동산 투기가 원인이라는 진단부터 잘못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투기 억제는 이미 실패한 정책일 뿐 아니라 국민적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정치적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집값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부가 내놓은 과도한 규제와 세금부터 정상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23일 한국경제학회에 따르면 손재영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와 황세진 한국개발연구원(KDI) 전문연구원은 ‘주택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하여’라는 주제의 ‘경제서신’에서 이같이 밝혔다. 경제서신은 해당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춘 경제학자들이 깊이 있는 의견을 내는 공간이다.
손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버클리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했다. 중앙도시계획위원회·국민경제자문회의 등에서 위원을 역임했다. 황 연구원은 이화여대에서 영어영문학 학사,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고 건국대에서 부동산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KDI에서 부동산 시장 동향 등을 담당하고 있다.
손 교수와 황 연구원은 현행 주택정책의 기조가 ‘박정희 패러다임’과 ‘전두환 패러다임’ 두 축으로 이뤄진 만큼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정희 패러다임은 투기 억제를 통한 부동산 가격 안정, 전두환 패러다임은 대단위 택지 개발을 통한 주택의 대량생산을 말한다.
두 사람은 박정희 패러다임은 실패했고 전두환 패러다임은 미흡했다고 진단했다. 이들은 “부동산 정책이 투기 억제와 동일시되는 것을 보면 박정희 패러다임은 국민 의식에 뿌리내렸지만 부동산 가격 안정과 같은 실효성 측면에서 실패했다”며 “공공 부문의 대규모 택지 개발을 바탕으로 주택을 대량생산·공급하는 전두환 패러다임도 절대적 주택 부족이 어느 정도 해소되면서 새롭게 대두되는 문제를 대처하기에 미흡하다”고 설명했다.
특히 투기를 억제해 부동산 가격을 잡겠다는 접근 방식이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1960년대부터 수많은 투기 억제 대책들이 시행되고도 여전히 같은 문제가 반복되는 것을 보면 투기 행위자를 지목하고 제재를 가해 가격 상승을 막겠다는 접근법은 실패했다”며 “투기 억제 대책들은 국민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정치적으로 필요할 수 있지만 가격 상승 속도를 몇 개월 늦추는 이상 효과를 가지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박정희 패러다임은 투기 때문에 주택 가격이 너무 높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예외적인 시기와 지역을 제외하면 가격에 거품이 있다는 징후를 찾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주택 가격 통계가 시작된 지난 1986년 1월 대비 올해 9월 전국 KB주택매매가격지수는 203%로 소비자물가지수(235%) 대비 상승률이 낮다. 시장이 어떤 형태로든지 왜곡됐거나 거품이 있어야 정부의 개입이 정당성을 갖지만 시장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국민경제에 피해를 주는 ‘투기’가 무엇인지 정의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객관적으로 관찰되고 있지 않다는 문제도 제기했다. 현 정부는 대표적인 투기 세력으로 다주택자를 지목하고 있다. 하지만 다주택자들은 임대주택 시장에서 절대다수의 물량을 공급하면서 나름대로 긍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정부의 투기 억제 대책은 빠짐없이 조세 제재를 포함했지만 집값은 다양한 요인으로 결정되는 만큼 세금만으로 주택 가격을 잡기 힘들다는 지적도 덧붙였다.
현 정부는 재건축이나 재개발사업 등 도시 정비 사업에 호의적이지 않지만 1980년대 주택 200만 가구 건설 계획에 따라 지어진 물량들이 노후화되면서 이를 정비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두 사람은 “박정희 패러다임을 지워나가면서 전두환 패러다임의 초점을 신도시 개발에서 도시 재생으로 전환해가는 것이 필요하다”며 “특히 이번 정부에서 투기 억제를 위해 도입한 수많은 과도한 규제 및 세제를 정상화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조지원기자 j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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