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대’는 경주시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신라 시대 고분이다. 지름 88m의 무덤으로 2개의 무덤을 합친 황남대총보다는 작지만 단독 무덤으로는 가장 크다. 봉황대 주변에는 일제강점기에 발굴됐던 금관총·서봉총·금령총 등 신라 시대의 큰 무덤이 즐비하다. 이 무덤에는 금관뿐 아니라 금귀걸이·금팔찌 등 화려한 유물이 엄청나게 묻혀 있다.
적석목곽분은 나무로 곽을 만들고, 그 위에 돌을 쌓고, 다시 그 위에 흙을 덮은 신라의 독특한 고분이며 5세기에서 6세기 전반 정도까지 유행한 무덤 형태다. 이렇게 큰 규모의 고분은 국력이 급성장하던 당시 신라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최근 봉황대에서 동편으로 350m 정도 떨어진 쪽샘지구 44호분에서도 금동관과 은제 허리띠, 금·은팔찌와 반지, 바둑돌 등 신라 시대의 화려한 유물들이 조사됐다. 특히 무덤의 주인공이 여성인데, 최근 수십 개의 바둑돌이 출토되면서 더욱 많은 관심을 끌었다. 최근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지난달 중순부터 다시 문을 닫은 상태지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하고 있는 이곳은 누구나 그 과정을 직접 볼 수 있는 관람 시설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안팎으로 뻗은 산하(山河)는 웅장하고/ 들판에 넘치는 물색도 풍요롭네/ 천문 살핀 곳 벽돌 기운 삼엄하고/ 새벽 알리는 종소리 마음 상쾌하네(이현일의 시 ‘봉황대(鳳凰臺)’ 중에서).’
조선 후기 학자 이현일이 27세이던 1654년(효종 5년) 경주에 와서 봉황대를 보고 읊은 시다. 20세에 과거 합격을 했지만 그 답안이 당시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내용이라 뒤늦게 취소된 그는 형제들과 함께 경주에 들러 봉황대를 비롯한 옥산서원·김유신묘 등 경주 일대를 둘러보며 시의 내용처럼 새롭게 심기일전하는 계기로 삼았다고 한다. 새해에는 봉황대를 바라보며 심기일전한 조선 학자 이현일처럼 우리 모두 심기일전하는 한 해가 되면 좋겠다.
/이종훈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
※ ‘봉황대’ 시의 원문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발간한 ‘우리 조상들이 다녀간 신라 왕경 경주’에 수록된 내용이며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 쪽샘지구 44호분 발굴 조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유튜브 채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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