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정부와 기업의 연구개발(R&D) 목표는 특허를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사업화가 되든 안 되든 특허출원이 많으면 선으로 여겼다. 이렇게 한참을 달려오다 보니 우리나라 특허출원량은 중국과 미국·일본에 이어 세계 4위다. 인구 대비로는 1위다.
국가 전체 R&D 예산은 민관을 합쳐 100조 원을 넘었다. 세계 5위 수준이다.
겉모습은 화려하다.
반면 다른 나라가 어떤 R&D에 사활을 걸고 있는지, 어떤 특허를 집중해서 출원하고 있는지 등에 대한 전략적인 분석은 미약하다. 특허는 R&D의 단순한 결과물이라는 인식도 뿌리 깊다. 이 같은 국가 R&D와 특허 인식에 대한 ‘변화’를 예고하는 사람이 있다. 김용래 특허청장이다. /대담=김홍길 성장기업부장 what@sedaily.com
김 청장은 지난 22일 특허청 서울사무소에서 서울경제와 만나 “전 세계 특허 동향을 분석해 R&D 전략을 짜야 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과거처럼 국가 R&D 과제를 정해놓고 예산과 인력을 투입할 게 아니라 다른 나라의 특허 정보를 면밀히 분석한 후에 “그들이 가지 않은 길(특허)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 청장은 이를 위해 특허 정보 분석(patent intelligence)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앞으로 국가든, 기업이든 R&D 전략을 짤 때 특허 정보 분석을 선행해야 성공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남들이 하지 않은 R&D가 어떤 것인지, 어느 국가가 특정 분야의 특허를 많이 출원하는지 등의 동향 분석을 통해 국가나 기업들이 R&D 전략을 짜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특허출원량만 많았지 쓸모 있는 특허가 없다는 이른바 ‘코리안 패러독스’도 쉽게 극복할 수 있다는 게 김 청장의 지론이다.
김 청장은 “코리안 패러독스를 얘기하지만 다른 많은 선진 국가들도 과거에 똑같은 일을 겪었거나 지금도 겪고 있는 현상”이라며 “문제는 특허의 양에서 질적으로 빨리 전환해야 하는 것인데, 특허 정보 분석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전 세계의 특허 정보를 분석하는 기술적인 토대는 이미 마련돼 있다. 전 세계 4억8,000만 건에 달하는 특허 정보를 분석할 수 있는 ‘국가 특허 빅데이터센터’가 지난해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유럽·일본 등도 전 세계 특허 동향에 대한 보고서를 내는 기능을 하는 기관은 있지만 전문적으로 별도 기관을 운영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전 세계 처음이다. 김 청장은 “글로벌 특허 전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우리나라가 적국의 무기 정보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정밀 레이더를 갖추고 전투에 임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 세계 최신 특허 기술 동향을 파악하고 새로운 산업의 표준 기술 후보들이 무엇이 될지에 대해 체계적으로 분석한 후 R&D 전략을 세우게 되면 그만큼 경쟁 우위에 올라설 수 있다는 것이다.
김 청장은 “정부 부처나 기업도 특허는 R&D의 결과물이라는 인식이 팽배한데, 선후를 바꾸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다행인 것은 일본의 수출 규제로 정부가 소재·부품·장비 국산화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을 하고 나서면서 특허 전략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정부가 ‘소부장’ 지원에 나서면서 어떤 특허를 얻기 위해 R&D 지원에 집중해야 하는지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는 전략적인 사고를 하게 됐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평가했다.
R&D를 투자가 아니라 비용으로 바라보는 인식을 바꾸는 것도 중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R&D라는 것은 당장 효과를 내기 어렵다. 게다가 한 우물만 판다고 해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 전 세계에서 쏟아지는 기술 변화의 속도를 보면 ‘성공’은 쓸모없어지거나 뒤처진 기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해법으로 김 청장은 “R&D를 결정하기 전에 전 세계 특허 정보를 먼저 분석하라”고 거듭 조언했다.
‘기-승-전-특허 정보 분석’이다. 그가 특허 정보 분석에 꽂힌 것은 “특허는 산업의 트렌드를 알 수 있는 선행 지수”라는 것을 실감해서다. 그는 “기술 개발자의 권리 보장으로만 여겼던 특허는 기업의 경영전략이나 국가의 정책 방향이 담겨 있는 보고”라고 강조했다.
특허를 잘 분석해보면 어떤 산업과 시장이 열리는지 미리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이 베트남에 특정 산업의 특허를 낸다고 보면 ‘미국이 베트남의 이 시장에 진출하는구나’와 같은 짐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대기업이 인수합병(M&A)을 할 때 지식 재산(IP)팀을 동반하는 것도 특허 등 지식 재산을 통해 미래 가치를 산정하기 위해서다.
김 청장은 지난해 8월 취임하기 전까지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산업과 에너지·통상 분야 현장을 누빈 ‘전문가’다. 이런 경험들이 특허청 혁신에도 반영되고 있다.
김 청장은 특허를 등록·관리하는 기관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역할을 과감하게 재설계 하도록 주문하고 있다. 지금까지 특허청은 양질의 특허를 보호하고 이 특허가 제 값을 받아 거래될 수 있도록 IP 시장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김 청장은 이를 넘어 미지의 영역인 ‘디지털 자산’으로 특허 정책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디지털 자산의 핵심인 데이터는 각국이 보호 범위를 어디까지 설정할지 아직 논의하는 단계다. 기술의 발달로 더 많이 쌓이고, 더 빨리 변화하고, 우리의 일상을 크게 바꿔 놓을 데이터를 어떻게 활용하고 전 세계에서 주도권을 잡을 지가 김 청장의 최대 관심사다. 그는 “데이터는 보호만 강조하면 활용이 미진하지만 보호를 간과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며 “이 접점을 찾는 일이 전 세계의 숙제”라고 밝혔다.
김 청장은 "코로나 펜데믹으로 경제와 산업 전반의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고 있으며, 보호무역 확산, 디지털 교역 확대, 글로벌 공급망(GVC) 재편 등 통상질서에도 커다란 변화를 야기하고 있다"며 "지난 해 8월 취임 이후 디지털 IP 태스크포스(TF)팀을 구성해 전략과 과제를 준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김 청장은 지식재산 제도와 행정을 디지털로 전환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데이터 생산·활용에 대한 지식재산 보호방안과 인공지능(AI)에 의한 발명·창작의 권리 부여 방안, 홀로그램 등 새로운 유형의 상표나 디자인, 3D 프린팅 데이터 생성·전송 등 디지털 환경 변화에 따른 지식재산 보호 문제 등을 해결할 수 있도록 관련 제도를 개선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업이 지식재산 데이터를 통해 새로운 비즈니스를 창출할 수 있도록 지식재산 데이터 가공·개방을 확대하고, 여러 곳에 분산된 지식재산 정보를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원스톱으로 제공하는데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디지털 기반 지식재산 혁신 인프라 조성도 김 청장에 주어진 몫이다. 그는 "온라인을 통한 위조상품 거래 등 디지털 환경에서 증가하는 새로운 권리 침해에 대한 보호방안을 마련해 기업의 지식재산이 제대로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특허청이 글로벌 디지털 통상환경 변화와 해외 지재권 침해 확산 등에 대응하기 위한 통상 표준을 리드하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논란이 되고 있는 한국형 증거수집제도(K-디스커버리) 도입에 대해서도 김 청장은 “현장의 목소리를 세심하게 듣고 제도에 반영하겠다”면서도 “기업들의 우려는 충분히 알고 있지만 기업도 변화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디스커버리는 특허 소송 전 당사자들의 증거와 정보를 공개해 명확하게 쟁점을 가리는 것이 취지다. 미국과 독일도 이미 이 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전 세계 기업과 기술 전쟁 중인 국내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는 K-디스커버리가 도입되면 소송 남발로 경영이 위축되고 영업 비밀까지 유출될 수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김 청장은 K-디스커버리 각론을 다듬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K-디스커버리를 통한 기술 보호가 반도체 업계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K-디스커버리는 기술 탈취 피해자가 침해자와 대등한 위치에서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기 때문이다. 김 청장은 “우리나라가 과거에는 선진국의 특허를 모방해 왔다면 이제는 남들이 모방하는 것을 막아야 하는 상황에 와 있다"며 "과거의 시스템을 유지할 수는 없다”며 “(K-디스커버리는) 우리의 기술을 쉽게 베낄 수 없도록 하는 안전장치가 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정리=양종곤 기자ggm11@sedaily.com 사진=오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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