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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경제] 중앙은행 흔드는 여권…경제위기 부르나

민병덕 의원 발의 손실보상법서 한은 국채 직매입 법제화

부채의 화폐화 진행되면 화폐가치하락·超인플레 가능성

국채시장 발달하면서 1995년 끝으로 국채 직매입 없어

정치에 한은 독립성 흔들리면 통화정책 약발 떨어질 수도





최근 한국은행을 둘러싼 이슈 가운데 가장 논란이 된 사안은 더불어민주당 민병덕 의원이 대표 발의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병 극복을 위한 손실보상 및 상생에 관한 특별법안’입니다. 해당 법안은 코로나 예방 조치로 피해를 본 소상공인에 대해 행정조치 수준에 따라 손실의 50~70% 수준을 국가가 지원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길어지면서 피해 집중 계층에 대한 선별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온 이 법안이 문제가 된 지점은 바로 재원입니다. 최대 98조8,000억원에 달하는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국가가 국채를 발행하고, 이를 한은이 매입한다는 내용이 포함됐기 때문입니다. 해당 법안이 공개된 이후 경제학자들은 한 목소리로 우려를 나타냈고 한은도 내부적으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한국은행 앞 /연합뉴스


한은은 지난해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국채 발행이 크게 늘어나는 과정에서 국채 11조원을 매입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법안이 유독 문제가 된 것은 매입 방식 때문입니다. 한은은 국채를 유통시장에서 단순매입 하고 있는데 이 법안은 발행시장에서 직매입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은이 국채를 발행시장에서 바로 매입한다는 것은 발권력을 가진 한은이 찍어내는 돈을 국채와 맞바꾼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를 ‘부채의 화폐화(monetization)’라고도 부릅니다. 중앙은행이 정부의 부채를 떠안는 셈입니다. 그런데 부채의 화폐화는 유럽연합(EU), 중국, 스웨덴, 캄보디아 등 여러 나라에서 법으로 금지하고 있고 일부 중남미 국가에서는 아예 헌법에 못을 박았습니다. 이주열 한은 총재도 지난해 국회에 나와 정부 지출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부채의 화폐화에 나설 계획이 없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중앙은행의 국채 직매입을 법으로 금지하거나 하지 않는 이유는 부채의 화폐화가 이뤄진 뒤 발생한 화폐 가치 하락과 초(超)인플레이션, 대외 신인도 하락 등이 발생한 것을 여러 차례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직매입은 시중 통화량 증가로 직결되는데 이럴 경우 물가가 급격히 오를 수 있습니다. 이미 넘치는 유동성이 부동산이나 주식에 몰리면서 자산 가격 상승이 문제되고 있는데 이런 움직임을 부추길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중앙은행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채매입 비중이 높아지면 외국인 투자자들의 신뢰 하락으로 통화 가치가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한은이 시장 상황을 판단하면서 매입을 해야 하는데 법으로 강제할 경우 국채매입 비중을 조절할 수 없게 됩니다. 정부의 현금인출기라는 지적까지 받는 일본중앙은행(BOJ)의 과도한 국채 매입은 오히려 금융시장 불안요소로 꼽히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한은법 75조에서 국채 직매입을 규정하고 있지만 사실상 사문화된 조항이라는 의견이 많습니다. 국내 채권 유통시장이 발달하지 않았던 1990년대 초중반까지 정부가 한은에 국채를 인수할 것을 강제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지만 이후로는 사례가 없습니다. 한은 관계자는 “국내 채권시장 수준이 높아지면서 1995년을 마지막으로 국채 직매입이 이뤄진 적이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은법도 아닌 특별법을 만들어서 국채 인수를 강제하는 것은 큰 문제라는 지적입니다. 국내 채권시장이 아시아 2위 수준으로 성장한 상황에서 정치권이 나서서 중앙은행의 국채 인수를 강요하는 상황이 후진적이라는 비판도 나옵니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도 한은의 국채 매입은 발행시장보다 유통시장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한국은행이 '2020년 4분기 및 연간 실질 국내총생산'을 발표한 26일 서울 중구 명동거리의 상점들이 간판에 불을 켜고 영업 중이지만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겨 썰렁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오승현기자 2021.01.26


한은 내부에서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침해할 수 있다는 점에 더 큰 우려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민간은 정치 영향을 받는 중앙은행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통화정책이 효과를 내기 어렵습니다. 특히 정치 세력은 선거 등을 전후해 정치적인 이유로 경제 정책을 추진하는 만큼 중앙은행 독립성이 필요합니다. 통화정책 독립성을 높여야 물가가 안정될 뿐 아니라 경기 변동 폭이 축소되고 금융시스템도 안정된다는 연구 결과는 이미 많이 나와 있습니다.

민병덕 의원 발의안에 이름을 올린 의원은 63명으로 전체 국회의원 5명 중 1명이 유례없는 국채 직매입을 통한 재원 마련에 동의했습니다. 해당 법안을 통해 필요한 돈은 얼마든지 한은이 찍어내서 마련하면 된다는 정치인들의 인식이 드러난 셈입니다. 코로나19 경제 위기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자산 가격 급등이나 가계 부채 증가 등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쌓여 있는데 정치권이 중앙은행의 발권력에 손을 대는 상황이 우려스럽습니다.

/조지원 기자 j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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