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조선업계의 골칫거리였던 '저가 수주'의 안개가 조금씩 걷히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연초까지 수주가 잇따르고,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서 조선사들의 뱃값 협상력이 강해질 여건이 마련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감이 늘어 조선소의 '도크(건조장)' 공간이 부족해지면 배를 발주하는 선주사와의 힘겨루기에서 우위에 설 수 있다. 조선사의 한 관계자는 "다행히 시황이 살아나면서 지난해 수주한 저수익 일감을 만회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하반기부터 선가 인상이 본격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1일 업계에 따르면 현대중공업그룹은 지난달에만 총 11척(1조3,000억원) 건조 계약을 체결했다. 포스코인터내셔널로부터 수주한 해양플랜트 일감(5,000억원)까지 더하면 2조원에 가까운 일감을 한달 만에 따낸 것이다. 같은 기간 삼성중공업도 고부가가치 선박인 액화천연가스(LNG)운반선 1척과 컨테이너선 2척으로 약 4,000억원의 수주 낭보를 전했다. 특히 작년 12월 세계 발주량(392만CGT) 가운데 73%인 285만CGT를 쓸어담으며 수주 뒷심을 발휘한 것까지 고려하면 '수주 랠리'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당초 업계에선 일감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소들이 공격적인 영업을 벌이면서 저가 수주 우려가 고개를 들었다. 선박 수주 가격을 가늠할 수 있는 조사 기관 클락슨의 신조선 가격지수를 보면 2019년 말 130포인트에서 2020년 말 126포인트로 3.2% 하락했다. 저가 수주의 배경에는 ‘조선소를 돌리려면 일감부터 따야 한다’는 현실론이 자리 잡고 있다. 일감이 없어 도크를 놀리기보다 인건비 등 운영비라도 건지기 위해서는 공격 수주에 나설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수요가 살아나면서 이같은 우려가 점차 해소되고 있다. 조업량이 줄어들지 않도록 단기에 일감을 확보하고 나면 좋은 선가로 수주하기 위해 선사와의 줄다리기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발주가 급한 선주사들과의 건조계약에서 조선3사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이다. 이봉진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조선사들이 내년 조업량이 줄어들지 않도록 일감을 확보하면서 선가가 상승해 공급자(조선소)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며 "하반기부터는 선가 상승이 본격화할 것으로 전망한다"고 말했다. 클락슨리서치는 올해 전 세계 발주량을 지난해 대비 21% 증가한 2,380만CGT(표준화물선환산톤수)로 예상하고 있다. 또 2022년부터 2025년까지는 연평균 3,510만CGT의 선박이 발주될 것으로 보고 있다.
원자재 가격이 오르는 점도 선가 인상 전망에 힘을 더한다. 지난해 한 때 배럴당 30달러대에서 움직이던 국제 유가는 최근 배럴당 50달러 중반으로 올랐고, 철광석 가격도 톤당 120달러에서 150달러선에서 움직이고 있다. 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철강재인 후판의 국내 가격은 전달보다 7% 올랐다.
조선업계 한 관계자는 "올해 컨테이너선, 벌크선 등 해운 운임이 높은 수준을 유지하면서 발주량이 늘어나는 양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한동희 기자 dwis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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