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현지 공장에서 칩 제작을 앞두고 미국 내 특허 전문 관리 업체(특허 괴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방어막을 치고 경쟁자인 삼성전자의 부상도 견제할 양수겸장의 카드일 수 있습니다.”
8일 반도체 업계의 한 임원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최강자 대만의 TSMC가 지난해 미국에서 등록한 특허의 개수가 전년 대비 22%나 늘어난 배경을 이렇게 짚었다.
일단 TSMC의 무더기 특허 등록은 삼성 견제에 활용될 수 있다. 삼성은 올해 미국에서 최대 170억 달러 투자를 결정할 가능성이 크다. 오는 2024년 애리조나주에서 5나노미터(㎚·10억분의 1m) 공장 가동에 들어가는 TSMC 입장에서는 ‘추격자’ 삼성의 예봉을 무디게 만들어야 한다. TSMC로서는 특허 괴물에 자신의 특허를 넘겨 삼성에 특허침해소송을 걸게하는 방식으로 특허를 무기화할 개연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미국 시장 연착륙을 위해서도 특허는 요긴한 측면이 있다. 미국 내 파운드리인 글로벌파운드리로서는 미국 현지에 똬리를 틀게 된 TSMC가 자신의 고객을 뺏어갈 가능성에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고 이런 우려가 소송 제기로 연결될 소지가 없지 않다. 더구나 미국 내에는 특허를 사모아 관련 업체에 소송을 걸어 이익을 챙기는 이른바 특허 괴물도 많다. TSMC가 소송의 빌미를 없애는 차원에서 대거 특허 등록에 나섰을 것이라는 얘기다. 재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기술 패권 경쟁과 맞물려 국가마다 부쩍 강화된 보호주의 기류를 등에 업고 무의미한 특허소송이 남발될 수 있는 만큼 이런 가능성에 철저히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예사롭지 않은 TSMC의 ‘특허 등록 러시’
변화가 극심한 기술 세계에서 기득권 파워를 강화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특허다. 선두 업체는 후발 업체의 시장 진입을 막기 위해 마치 지뢰처럼 곳곳에 특허를 매설한다. 가령 부침이 심한 정보기술(IT) 업계에서 혁신적인 제품을 내놓은 적이 없는 마이크로소프트(MS)가 여전히 건재한 것은 윈도 환경을 선점해 초반의 우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지식재산연구원의 지난해 미국 등록 특허 분석 자료에서도 이는 여실히 드러난다. IBM이 9,130건의 특허로 1위에 오른 것을 비롯해 △캐논(3위, 3,225건) △MS(4위, 2,905건) △인텔(5위, 2,867건) 등 전통의 기업들이 앞자리를 대거 차지했다.
비교되는 것은 미국 투자에 나선 삼성과 TSMC다. 삼성은 지난 2007년 이후 14년째 2위를 지켰지만 지난해 특허 등록이 전년 대비 1%(54개) 빠졌다. 반면 TSMC의 경우 순위는 12위에서 6위로, 등록 특허도 2,833개로 22% 증가했다. 미국 시장에서 눈에 띄게 특허 등록을 늘린 것이다. 전문가들은 현지 공장 진출을 앞두고 특허소송에 대비하는 측면이 있다고 보고 있다.
앞서 TSMC는 2019년 글로벌파운드리로부터 미국과 독일에서 특허침해소송을 당한 바 있다. 당시 업계에서는 TSMC보다 기술력이 처지는 글로벌파운드리의 특허침해소송을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애초 맞소송을 걸며 전면전을 불사하는 듯했던 TSMC는 두 달 만에 서둘러 사건을 봉합했다. 진흙탕 싸움을 해봐야 얻을 게 없다는 판단으로 글로벌파운드리와 합의한 것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TSMC가 조만간 미국에서 칩 제조에 돌입하는 만큼 특허에 대한 점검에 나섰을 수 있다”며 “대만 등에서는 등록했지만 미국에서는 출원하지 않은 특허가 있을 수 있고, 초미세 공정이나 후공정 연구개발(R&D)을 통해 쌓은 기술을 서둘러 특허 출원으로 매조지하려는 의도도 읽힌다”고 진단했다.
이와 관련, 올 1월 미국의 특허 전문 관리 업체인 NPE가 TSMC로부터 특허를 사들여 삼성에 소송을 제기한 사건이 거론되기도 한다. 삼성을 견제하려는 TSMC와 특허소송으로 로열티를 뜯어내려는 특허 괴물 간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질 경우 TSMC의 특허가 악용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다만 특허 등록 건수만 보면 삼성이 6,415개로 TSMC의 2.3배나 된다는 점에서 과도한 우려라는 반론도 만만찮다.
■화웨이 특허 등록 급증은 중국의 특허 시위
화웨이의 특허 등록 급증도 눈에 띈다. 지난해 미국 내 화웨이의 특허 등록은 전년 대비 14%나 늘었다. 증가율만 보면 TSMC에 이어 2위다. 애플(12%)보다도 앞선다.
전문가들은 중국이 특허 시위에 나선 것으로 본다. 화웨이의 경우 스마트폰에 구글의 안드로이드 운영체제(OS) 탑재는 물론 통신 장비 판매도 안 되는 등 이미 각종 제재로 미국 시장에서 경쟁력을 상실한 상태다. 그런 만큼 미국에 특허를 등록하는 것을 비즈니스 실익 때문으로 보기는 어렵다. 한 반도체 전문가는 “중국 업체들이 기술 탈취에 혈안이라고 미국 정부가 비판하고 있는 데 따른 반작용 아닐까 싶다"며 “미국에 특허를 등록함으로써 중국은 지적재산권 보호에 적극적이라는 이미지를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와 전 세계에 심어주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제스처”라고 봤다.
/이상훈 기자 shle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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