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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정치권 과거 얘기만 갖고 논쟁…나라가 침몰하는 배 꼴 되지 않아야” [청론직설]

◆염재호 전 고려대 총장(SK 이사회 의장)

교육부, 재정으로 대학 통제하며 혁신 '발목'

정치권은 대학 구조조정·미래 준비 등 외면

'벼랑끝' 대학도 인재 양성·R&D 사업화 부진

젊은 세대에게 21세기 비전·해법 제시해야

염재호 전 고려대 총장이 24일 고려대 SK미래관에서 가진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정부나 여야 정치권 모두 과거 얘기만 놓고 논쟁하고 있어서 답답하다”며 “젊은이들에게 미래 비전과 꿈을 줘야 하는데 21세기 문제를 풀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오승현 기자




“정부나 여야 정치권이 모두 과거 얘기만 가지고 논쟁하는 데다 정직하지 못해서 답답합니다. 젊은이들에게 미래 비전과 꿈을 줘야 하는데 21세기 문제를 풀 생각을 하지 않고 있어요.”

염재호(66) 전 고려대 총장(SK 이사회 의장)은 24일 서울 안암동 고려대 SK미래관에서 서울경제와 인터뷰를 갖고 “정치권·정부·대학 모두 21세기로 나아가지 못하고 20세기 방식에 머물러 있다”며 이 같은 문제를 제기했다. 특히 정부가 등록금을 13년째 동결하고 학교마다 몇 십억 원씩 지원하는 방식 등으로 대학을 통제하려 해 창의성을 꽃피우지 못하고 있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지방대의 경우 학령인구 감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 따른 외국 학생 감소 등이 겹쳐 ‘벚꽃 피는 순서대로 망한다’고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지만 정치권과 정부가 대학 구조 조정에 팔을 걷어붙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벼랑 끝에 몰려 있는데도 대학에 변화를 거부하는 관성이 있고 교육부·정치권·전교조도 심각한 사교육 문제를 풀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고 꼬집었다. 염 전 총장은 “대학 연구개발(R&D)의 경우 정부 과제를 받아 논문만 쓰는 경우가 많은데 기업 R&D에도 적극 동참해 기업과 대학이 특허를 같이 쓸 수 있게 해줘야 한다”며 “기업인들이 가업상속시 상속세 부담이 매우 큰데 대학에 상속 주식을 신탁하도록 하면 경영권은 유지하되 배당금은 대학의 R&D 재원으로 쓸 수 있어 윈윈”이라고 제안했다

-고려대 총장 재임 시절 여러 가지 혁신 실험을 했는데.

△당시 처장들과 함께 매달 1박 2일 워크숍을 했는데 학생 출석부, 상대평가, 시험 감독을 없앴다. 학생들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우도록 했다. 8주간 집중 토론하는 유연학기제를 일부 운영했더니 교육부가 처음에 반대하다가 나중에는 오히려 권장했다. 융합연구원을 가동해 교수가 창업할 경우 월급을 깎는 대신에 교육 시간을 줄여줬다. 교수들한테 연구 자료를 만들어 기업들과 많이 연계해 연간 200억 원 규모의 기업 과제를 따도록 지원했는데 학교는 간접비로 30%만 떼고 나머지는 자율적으로 연구비로 쓰도록 했다. 교수 업적 평가에 기업 R&D 실적도 반영했다. 교수 평가에서 논문의 양보다 질을 중시했다. 두 번 이상 정상 승진을 못 하면 명예교수 신청을 어렵게 했다.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실시하는 병원·의대의 기술사업화를 참고한 ‘KU MAGIC’ 프로그램을 고려대 의료원에서 시행했다. 병원 침대 수 기준으로 경쟁하지 말고 미래 의료와 의대와 이공대 간 융합연구를 강조했다. SK와 IBM 등의 연구원들을 고대병원에 파견받아 협업했다. 어느 학과든 좋은 교수를 수시로 스카우트하라고 독려해 우수 과학자들을 유치했다. 다만 문과 쪽에서 반발해 공개 채용 식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 안타깝다.



-실제 우리 대학들이 많이 변했다고 보는가.

△대학이 완전히 벼랑 끝에 몰렸는데 여전히 20세기 교육 체계에 머물러 있다. 융합해 창의적 지식과 교양을 창출하고 토론과 집단 지성을 발휘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 하나의 정답만을 찾는 교육에서 벗어나야 한다. 600억 원 이상 들여 재작년 말 문을 연 SK미래관에 교실을 만들지 않고 토론실과 리빙랩 식으로 기업 프로젝트도 수행할 수 있게 했다. 임기 중 구상한 것 가운데 실패한 것이 미래대학인데 당시 미네르바스쿨처럼 미래대를 하겠다고 하니 ‘귀족 학부를 만든다’며 학생들이 총장실을 점거하며 반발했다. 교수들도 정원을 과별로 한 명씩만 내놓으라고 하는 것도 거부했다.

-관료나 정치인들을 많이 상대해봤을 텐데 그들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그들은 21세기 문제를 풀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정치권과 정부가 등록금을 13년째 동결했는데 교육부는 ‘두뇌 한국(BK)21’ 사업으로 연간 20억~30억 원씩 학교마다 지원한다면서 대학을 통제하려고 한다. 고려대 재정이 학교가 1조 2,000억 원, 병원이 1조 3,000억 원인데 말이다. 일제 잔재가 청산되지 않아 순사가 칼 차고 학교에 들어온 것과 같다. 교육부 감사도 철학과 가치판단을 갖고 해야지 로봇처럼 한다. 교육에 관해 감사하는 게 아니라 건물 전기공사를 분리 발주하지 않았다며 처장 등 교수 여러 명에게 각각 수백만 원의 벌금을 부과하는 식이다. 정치권에 나라를 어떻게 이끌고 가겠다는 비전과 전략이 없고 관료들은 복지부동한다. 무슨 자리를 맡으면 ‘다음 자리 어디 갈까’부터 생각한다. 관리형으로 자리 보전이나 하려는 사람들도 나쁘다. 국회의원들도 사익을 국익보다 앞세우는 사례가 적지 않다. 정부나 여야 모두 과거 얘기 갖고 논쟁만 하는데 젊은이들에게 비전과 꿈을 줘야 한다.

-소위 ‘조국 사태’ 이후 입시에서 수능 반영 비중을 늘리는 식으로 미봉책을 쓰던데.

△여론에 밀려 그렇게 됐는데 사교육을 없애고 공교육을 정상화하는 데 역행하는 조치다. 조국 사태는 10여년 전 일로 당시 추천서라든지 그런 것은 이미 다 없어졌다. 수시에서 학생부 기재 항목이 더 줄어들게 돼 변별력도 부족하다. 수능 비중을 늘리면 학원만 더 번성하게 하고 강남 집값을 더 올려주는 문제를 낳을 수 있다. 나의 총장 재임 시절 고려대는 수능으로 15%만 뽑고 면접관을 크게 늘려 3,700명의 신입생을 1,000개 고교에서 뽑았다. 지금 교육부·학원가·전교조가 철의 삼각지대로 사교육비 문제를 야기한다. 학원들이 정치 헌금도 많이 해서인지 정치권이 손을 못 대는 것 같다. 학령인구가 감소하니 학원은 공무원 시험이나 자격증 시험에도 초점을 맞춘다. 올해 9급 공무원을 5,300명 넘게 뽑는데 평균 경쟁률이 50 대 1을 넘는다. 개업한 공인중개사가 11만 명가량(장롱 면허 35만 명)인데 아직도 연 1만 명씩 뽑는다. 모두 학원을 먹여 살리는 제도다. 김영삼 정부 때 공업고가 대학으로 대거 전환됐는데 당시 교육부 출신들이 총장이 된 경우가 많았다. 지금 대학이 구조 조정에 나서지 않는 것은 직무 유기다.



-인재 양성이 중요한데 일자리 문제를 어떻게 보는가.

△문재인 정부 초기 청와대 일자리수석에게 ‘30대 대기업은 10년 정도 신입 사원을 채용하지 않고 중소기업에서 경력직을 뽑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한 적이 있다. 중소기업은 좋은 사람 뽑기가 무척 힘든데 학생들은 오랫동안 학교에 머무르며 대기업과 공무원 등을 노린다. 심지어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출신도 7·9급 공무원 시험을 본다. 나라가 서서히 침몰하는 배 꼴이 될 수도 있다. 중소기업 취업에서 출발해 대기업 취업이나 창업으로 선순환이 이뤄져야 한다. 대기업들도 인력 양성 무임승차 논란을 피하기 위해 중소기업에 기술도 주고 훈련도 시키고 투자도 해주는 등 상생해야 한다. SK의 경우 최태원 회장이 친환경, 사회적 가치, 투명 경영(ESG)에 앞장서고 이사회는 사외이사로만 구성된 거버넌스위원회에서 정치적·사회적·글로벌 리스크를 따진다. 요즘은 그런 것이 주가에도 영향을 미친다. 최고경영자(CEO)는 단기적 이익 위주로 보니까 길게 보자고 한다.



-벤처기업 연구원만이라도 스카우트할 때 해당 기업에 이적료를 주게 하면 어떤가.

△충분히 가능하다. 프로 스포츠에서 선수를 스카우트할 때 이적료를 해당 구단에 주는 식이다. 그러면 중소기업도 훌륭한 인력을 유치해 키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지방대도 교수 이탈로 골머리를 앓는데 교수를 스카우트하면 첫해 연봉의 10~15%를 본인이든 학교 등 이탈 학교에 주게 할 수도 있다.

-대학이 R&D 혁신의 베이스캠프가 돼야 하는데.

△고려대 인근 홍릉밸리(홍릉의료·바이오산업지구)에 오는 2025년까지 국비와 지방비 5,000억 원이 투입되는데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등 연구소와 대학 등이 기업들과 함께 R&D를 해볼 만하다.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미국 스탠퍼드대 주변 실리콘밸리, 스웨덴 스톡홀름공대 주변 시스타사이언스파크처럼 만들어야 한다. 싱가포르 에이스타(A*STAR)도 바이오 허브를 구축하기 위해 외국 기업과 연구자를 과감히 유치했다. 우리도 존슨앤존슨이라든지 국내외 기업의 R&D센터를 대학 옆에 유치해야 한다. 하지만 국가적으로 R&D 전략이 부족하다. 기초과학연구원(IBS)의 연구단들에 연구비를 몰아주면 뭐하나. 이명박 정부 때 국가과학기술위원을 지냈는데, 당시 구제역 사태로 소·돼지 등 살처분 보상금으로만 3조 7,000억 원을 썼는데 정작 감염병 R&D 예산은 얼마 되지 않더라.



-대학이 산학 협력 등 기술사업화를 통해 성장 동력을 만들어야 하는데.

△정부 과제 연구비는 지정된 용도로만 써야 하기 때문에 연구 부정 유혹이 있다. 교수들은 주로 정부 과제를 맡아 논문만 쓰고 만다. 교수들이 기업과 함께 연구개발을 해야 한다. 단 기업이 사실상 특허를 가져가는데 학교도 같이 쓸 수 있도록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교육부 등 정부가 나서야 한다. 고려대는 100대 KU크림슨 기업을 유치하려고 한다. 대학에서 교수가 창업해 성공하면 칭찬해주고 그 교수도 많이 기부하는 문화가 형성돼야 한다. 외환위기 이후 이공계 위기론이 대두됐는데 몇 년 전부터 서울대 일부 학과에서 이공계 대학원생 미달 사태도 났다. 학생들에게 이공대를 가야 한다는 신호를 줘야 한다. 고려대에 사이버국방학과를 만들듯 모든 대학이 특색 있는 학과를 육성해야 한다.

-중견 기업 오너 등이 대학에 기부를 많이 하게 하는 것도 필요할 텐데.

△가업 승계 시 높은 상속세 부담으로 경영권 단절을 우려하는 사례가 많다. 정치권과 정부가 질투심에 편승하지 말고 상속세를 좀 낮췄으면 한다. 일단 상속 주식을 대학에 신탁해 배당금의 세후 이익금을 대학 R&D에만 쓰도록 하되 상속인은 경영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요즘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태로 부동산 투기 의혹이 핫이슈로 떠올랐는데.

△공공 부문의 모럴해저드는 엄격히 차단해야 한다. 또 도심에 공공 임대주택을 많이 지어 월 100만 원 정도에 좋은 집에서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지방 공동화가 심각한데 도시민이 수도권 이외 지방에도 주택을 소유하는 식으로 1가구 2주택을 오히려 권장할 필요도 있다. 앞으로 10년 내 4일 근무로 바뀔 것이고 재택근무도 확대될 것이다. 부모가 돌아가신 뒤 시골 집을 상속해도 1가구 2주택이라고 하는데 난센스다. 일본의 심각한 빈집 문제를 보고도 그런 정책을 계속 유지할 것인가.

he is...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나 신일고와 고려대 법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일본 첨단산업과 정부·기업 네트워크 연구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에서 행정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기획예산처장, 국제교육원장, 행정대외부총장, 19대 총장을 지냈다. 일본 히토쓰바시대, 쓰쿠바대, 중국 베이징대, 영국 브라이튼대 등에서 객원연구원 또는 외국인 교수로 일했다. 한국정책학회장, 현대일본학회장, 서울시산학연네트워크포럼 대표 등을 거쳤다. 정부에서는 외교부 정책자문위원장, 공공기관경영평가단장, 우정사업운영위원장, 국가과학기술위원, 감사원 혁신발전위원장 등을 지냈다. 현재 고려대 명예교수이며 SK㈜ 이사회 의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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