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 글로벌 공급사슬망(SCM) 재구축에 직접 나서는데 청와대는 지금까지 뒷짐 지고 있다가 왜 이제야 나타나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재계 관계자는 문재인 대통령이 12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을 통해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이 모든 법정 분쟁을 종식하기로 한 것은 참으로 다행”이라고 밝히자 반가움보다는 서운함을 토로했다.
LG그룹과 SK그룹은 지난 2년간 이어져온 영업 비밀 침해 소송으로 수천억 원의 소송 비용을 지불하며 ‘혈투’를 벌였다. 무엇보다 이들의 소송전은 ‘배터리 공급망’ 붕괴를 우려한 폭스바겐 등 주요 완성차 업체들의 자체 배터리 공급망 구축으로 이어져 ‘K배터리’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는 우려까지 낳았다. 당시 재계에서는 “문 대통령이 직접 나서 재계 총수들 간 협상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청와대는 ‘검찰 개혁’과 ‘부동산 정책’에 정신이 없었다.
이 같은 청와대의 행보 탓인지 한국의 새로운 주력 산업인 배터리는 물론 절대 우위를 갖고 있던 메모리 반도체 등 기존 산업까지 미국과 중국, 그리고 유럽연합(EU)의 추격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글로벌 각국이 자국 산업 육성을 위해 발 빠르게 뛰어다니는 지금도 청와대의 주력 산업 육성 비전은 보이지 않는다.
안보와 맞물린 공급망, 컨트롤타워가 필요
이날 산업통상자원부 등 관계 부처에 따르면 정부는 다음 달 ‘K반도체 벨트 전략’을 공개한다. 산업부가 관련 전략의 큰 밑그림을 그리며 기획재정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교육부·국토교토부·환경부 등 관계 부처가 협업한다.
문제는 반도체 산업 육성이라는 단일 목표에 매진하는 산업부와 달리 이번 전략과 관련한 각 부처별 이해관계가 벌써부터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반도체 업계가 K반도체 벨트 전략에 포함시켜달라고 요구한 ‘연구개발(R&D) 및 제조 시설 투자 비용 세액공제율 최대 50% 확대’는 세수 감소와 연결돼 주무 부처인 기재부 내부에서 난색을 표하고 있다.
또 ‘반도체 제조 시설 설립 시 인허가, 전력 및 용수 공급, 폐수 처리 시설 등 인프라 지원’은 국토 균형 발전(국토부)과 환경오염(환경부) 등으로 관계 부처의 협력을 끌어내기 쉽지 않다. ‘원천 기술 개발형 인력 양성 사업’과 ‘수도권 대학의 반도체 관련 학과 신설’ 또한 교육부와 과기정통부 등 여러 부처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산업부가 K반도체 벨트 전략을 마련한다 하더라도 각 부처의 이해관계를 감안해 경제부총리가 주재하는 ‘비상경제중앙대책본부회의’나 ‘혁신성장빅3추진회의’의 주요 안건 중 하나로 발표된다면 출발부터 동력이 약화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청와대가 직접 나서 산업 정책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정부 부처 1급(실장급) 출신의 한 전직 관료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은 외교안보 이슈와도 관련이 있는 만큼 부처 차원에서 다루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실효성 있는 지원 정책이 필요
이 같은 지적에도 불구하고 청와대나 관계 부처는 반도체와 배터리 산업 육성과 관련해 눈에 띄는 움직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한국판 뉴딜 행사에 참석해 “인공지능(AI) 반도체를 제2의 D램으로 키우고 오는 2029년까지 1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지만 이미 삼성전자 등 기존 사업자들이 신경망반도체(NPU) 개발에 매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의 지원책이 실효성을 발휘할지 의문이다. 문 대통령은 이날 페이스북에 “우리 2차전지 업계가 더욱 발 빠르게 움직여서 친환경 전기차 산업의 발전을 선도해달라”고 당부했지만 전기차 배터리 산업 육성을 위한 어떠한 정책적 제안도 없는 단순 ‘레토릭’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정치권 관계자는 “청와대가 미중 간 줄타기 외교에 집중하는 사이 미중 간 글로벌 산업 전쟁에서도 우리 국익을 확실하게 챙기지 못하는 모습”이라며 “청와대가 지난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 등에서 가동했던 비상회의기구(워룸)를 기업 위기 시에도 가동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美中 기술전쟁, 강 건너 불구경
이와 달리 미국은 반도체 등 자국의 핵심 산업 육성을 위해 백악관은 물론 행정부를 견제하는 의회까지도 힘을 합쳐 ‘2인3각’으로 움직이고 있다. 미국 의회는 1월 ‘2021회계연도 국방수권법(NDAA)’을 통해 반도체 산업을 국가 전략 산업으로 지정한 데 이어 반도체 시설투자액의 40%를 세액공제해주는 ‘반도체생산촉진법’을 통과시켰다. 바이든 대통령은 올 2월 상·하원 의원 11명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반도체생산촉진법을 시행하기 위해 370억 달러가 필요하다”며 의회의 협조를 당부한 데 이어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희토류 등 핵심 품목 공급망을 점검하기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하기도 했다. 집권 여당이 180석을 차지해 여타 정권 대비 산업 육성 관련 법 제정이 수월한 현 청와대에서 보기 힘든 움직임이다.
중국은 표면적으로는 미국의 압박에 밀리는 듯하지만 기술 자립의 목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중국 재정부와 세무총국 등은 지난달 ‘반도체·소프트웨어 산업 발전을 지원하기 위한 수입관세 정책’을 발표하며 65나노 이하의 반도체 생산 기업이 자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부품을 수입할 경우 무관세 혜택을 제공하기로 했다. 2025년까지 반도체 부문에 총 170조 원을 투자하는 ‘중국 제조 2025’ 또한 현재 진행형이다.
/세종=양철민 기자 chopin@sedaily.com, 곽윤아 기자 ori@sedaily.com, 윤경환 기자 ykh22@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