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4년 4월 당시 개빈 뉴섬 미국 샌프란시스코 시장은 기자회견 자리에서 혼다 수소차의 배기관에서 나오는 배출수를 컵에 모아 한 모금 마셨다. 수소차에서는 배기가스 대신 물이 나온다. 더 깨끗한 환경을 위해 수소경제 시대로 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퍼포먼스였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2017년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테드 강연에서 “아직도 수소전기차를 추구하는 회사가 있다”며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격하했다.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수소 인프라 구축에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뉴섬 시장과 머스크의 일화는 전 세계 수소경제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무궁무진하며 깨끗한 자원이라는 매력에도 불구하고 수소 생태계의 확산은 더디다. 규모의 경제가 되지 않아 인프라 투자가 이뤄지지 못하고 이는 다시 수소 생태계의 성장을 제약하고 있다.
만약 수소차와 수소 사용 시설을 한 지역에 모을 수 있다면 어떨까. 충전소 등 인프라를 구축할 만한 경제성이 보장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렇게 탄생한 개념이 바로 ‘수소 도시(Hydrogen City)’다.
본격화한 수소도시 레이스
전문가들은 수소 생태계 육성 방법으로 수소 도시 활용을 강조하고 있다. 권태규 국토교통과학기술진흥원 기획그룹장은 “현대차의 넥쏘가 아무리 우수하더라도 충전소나 수소 공급 자체가 부족하면 이용하기 어렵다”며 “존재하지 않던 수소 시장을 일부 지역에 만들어주면 선순환을 일으켜 생태계 전체가 급성장하는 ‘눈덩이 효과’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몇 년 사이 수소 도시 조성 경쟁이 세계 각지에서 펼쳐지고 있다. 일본의 경우 도쿄 올림픽선수촌을 수소 도시로 조성하고 있다. 충전소와 수소차량을 보급해 선수단이 수소 버스를 이용하고 선수단 숙소의 에너지 일부를 수소로 공급한다. 영국도 리즈시(Leeds City)를 오는 2030년까지 세계 최초의 수소경제 도시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최근에는 미국의 약진이 거세다.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 이후 미국이 파리협약에 재가입하면서다. 가장 적극적인 곳은 캘리포니아주. 이미 미국 전역 48개의 수소충전소 중 45개가 있는 곳으로 2027년까지 1억 1,500만 달러(약 1,280억 원)를 들여 이를 1,000개까지 늘린다는 계획을 지난해 발표했다. 수소 생산 시설이나 연구 시설도 조성한다. 흥미로운 점은 캘리포니아를 수소 거점으로 육성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17년 전 수소차 배출수를 마셨던 개빈 뉴섬이라는 것이다. 그는 지금 캘리포니아 주지사다.
국내도 시범도시 4곳 육성…'선점 기회 있다'
우리나라도 2019년 안산과 울산, 완주·전주, 삼척을 수소 시범 도시로 선정했다. 이곳에서는 수소차량과 수소 에너지를 쓰는 건물, 이송 파이프, 스마트팜 등이 들어선다. 예를 들어 울산의 경우 임대주택 총 810가구에 수소로 만든 전기와 난방열을 공급한다. 수소로 움직이는 시내버스와 지게차·유람선 등도 운영된다. 국토부 관계자는 “대부분의 설계가 완료되고 발주가 한창 진행 중”이라며 “올 하반기면 착공 단계에 돌입한다”고 전했다.
수소경제가 초창기인 만큼 국내 수소 시범 도시 수준이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가 나온다. 수소경제위원회 자문위원인 강상규 광주과학기술원 기계공학부 교수는 “해외에서도 도시 전체 규모로 수소 전 주기 기술을 구현한 곳은 없다”며 “우리나라가 가장 빠르기 때문에 해외 벤치마킹 대상이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평가했다. 포브스 역시 국내 수소 시범 도시의 규모와 내용을 두고 ‘세계 수소 도시의 청사진이 될 것’이라는 평가를 내린 바 있다. 전략과 실행력이 받쳐준다면 수소 도시에서 우리나라가 초격차를 만들 수있는 기회가 있다는 뜻이다.
해외수출 등 산업화 전략 가동해야
전문가들과 담당 부처에서는 다만 수소도시법의 빠른 처리가 시급하다고 조언한다. 국토부의 한 관계자는 “수소도시법은 예산 확보의 근거일 뿐 아니라 수소 도시 조성 과정에서 21개 법상 인허가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의제 조항을 담고 있다”며 “대규모 수소 도시를 조성하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이를테면 수소도시법이 없다면 수소 배관을 장거리 매설할 때 도로 관련 인허가 등 각종 인허가를 따로 받아야 하며 예산도 확보하기 어려워진다. 애초 정부는 지난해 통과를 목표로 했으나 국회 처리가 지연되면서 아직 위원회에 계류돼 있다.
장기적으로는 수소 도시를 해외 거점과 연계하거나 그 자체로 수출 모델로 육성해야 한다는 제언도 있다. 권 그룹장은 “신재생에너지 생산 여건이 좋은 중동 지역에 우리 수전해 기술을 투입해 지속 가능한 수소 생산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며 “건설 토목 사업과 수소 산업을 결합해 해외 수소 도시 건립 사업도 새로운 수출 상품으로 육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흥록 기자 ro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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