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거래소는 주식거래 시장에서 심판 역할은 한다. 거래소에 상장된 2,300여 개 종목의 공정한 가격 형성과 투자자 보호를 위해 기업공시, 상장 심사, 시장 감시 등의 기능을 수행한다. 투자자들은 이런 거래소를 믿고 매일 15조~20조 원어치의 주식을 사고판다.
그런데 거래소가 심판 역할에서 벗어나 선수로 직접 뛰겠다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거래소가 직접 투자했거나 관계사가 투자한 기업을 거래소에 상장한다면 ‘이해 충돌’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 상장 심사때부터 객관성 논란이 생기기 때문이다. 거래소에 대한 투자자의 신뢰 역시 추락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암호화폐 시장에서는 이런 일이 수시로 일어난다. 기업공시에서부터 상장 절차까지 자본시장법의 구속을 받는 증권거래소와 달리 암호화폐 거래소들은 규제의 사각지대에 있기 때문이다. 거래소가 직접 보유 중이거나 관계사가 개발한 코인을 자신의 거래소에 ‘셀프 상장’하더라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다. 이 때문에 대형 거래소와 중소형 거래소를 구분하지 않고 셀프 상장이 수없이 자행된다.
국내 최대 암호화폐 거래소인 업비트를 운영하는 두나무도 ‘셀프 상장’ 논란에 휩싸였다. 두나무의 100% 자회사인 두나무앤파트너스는 지난 2018년 루나(LUNA) 코인을 발행하는 프로젝트 ‘테라’에 투자했다. 문제는 루나 코인이 이듬해 7월 두나무가 운영하는 업비트에 상장했다는 점이다. 올 2월 두나무앤파트너스가 루나를 전량 매도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투자 사실이 알려졌고 ‘셀프 상장’ 논란에 휘말렸다. 주식시장으로 치면 한국거래소가 자회사를 이용해 비상장 종목에 투자한 뒤 이를 거래소에 셀프 상장해 되판 셈이다. 업계에서는 두나무앤파트너스가 업비트에 상장된 루나를 매도해 거둔 차익만 1,000억 원이 넘을 것으로 추산한다.
'마로(MARO)’ 코인도 마찬가지다. 두나무앤파트너스는 2018년 마로 개발사인 TTC 프로토콜에 투자하면서 마로의 전신 ‘TTC’를 매입했다. 마로는 1년 뒤 업비트에 상장했다.
카카오 블록체인 계열사 그라운드X가 발행한 암호화폐 클레이(KLAY)도 셀프 상장 논란을 비켜갈 수 없다. 카카오는 업비트 운영사 두나무의 지분을 직간접적으로 22.6% 보유하고 있다. 카카오가 직접적으로 두나무 지분 8.1%을 갖고 있고 카카오 자회사인 케이큐브 벤처투자조합이 11.8%, 카카오 청년창업펀드가 2.7%를 보유하고 있다. 클레이는 2019년부터 업비트 인도네시아와 업비트 싱가포르에서 거래되고 있다. 업계에서는 “당초 클레이를 국내 업비트 원화마켓에 상장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셀프 상장 비판이 나오자 해외 거래소로 돌린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거래소가 직접 암호화폐를 발행해 상장하기도 한다. 국내 암호화폐 거래소인 △캐셔레스트 △코인빗 △코인제스트 등이 자체 암호화폐인 ‘거래소 토큰’을 상장했다. 이 토큰을 매수해도 거래소의 지분을 가질 수 없다. 주주로서의 권리도 없고 피해 보상도 청구하기 어렵다. 현재 자금난으로 문을 닫은 코인제스트가 발행한 ‘코즈’는 이미 휴지 조각이 됐다.
빗썸은 BXA 토큰을 상장하려다 이해 상충 문제가 불거지자 상장을 취소했다. BXA는 당시 빗썸 인수를 타진했던 김병건 BK그룹회장이 발행한 암호화폐다. 2019년 1월 빗썸은 전 세계 최초로 BXA 토큰을 판매하고 빗썸에 상장된 암호화폐 거래를 하는 모든 회원에게 BXA를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투자자들은 곧바로 “이해 상충 문제가 우려된다”며 강하게 반발했고 빗썸은 이를 무산시켰다.
해외 거래소들의 셀프 상장은 더욱 빈번하게 발생한다. 바이낸스는 2019년 인도 암호화폐 거래소 와지르X를 인수했다. 지난해 1월 바이낸스는 와지르X의 암호화폐를 판매했고 거래소에 상장시켰다.
암호화폐 거래소의 셀프 상장은 이해 상충 문제 외에도 시세 조정에 악용될 수도 있다. 시세 조정에 따른 피해는 투자자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규제가 필요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국내에서는 관련 법이 없어 규제할 근거가 없다. 채민성 법무법인 리인 변호사는 “증권시장에서는 거래소가 상장을 심사, 거래 지원, 매입·매도가 한 플랫폼에서 이뤄지는 것이 법령상 엄격히 금지돼 있다”며 “그러나 암호화폐(가상 자산)는 특금법에 따른 규정만 있을 뿐 자본시장법의 규제 대상이 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업계와 투자자들은 관련 법안 마련을 촉구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금융 당국이 암호화폐 거래소에 엄포만 놓고 있지만 실질적인 규제 또는 투자자 보호책 마련은 하고 있지 않다”며 “제대로 된 규제 방안이 나와야 시장 질서가 확립될 것”이라고 말했다./노윤주·도예리 기자 daisyroh@decent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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