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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여인은 왜 일그러졌나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

피카소의 여인 등 110여점 출동

'한국에서의 학살' 첫 국내 전시

파블로 피카소 '마리 테레즈의 초상' 1937년작 유화 /사진제공=비채아트뮤지엄 ⓒ 2021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젊은 여인의 싱그러운 살결이 5월 봄 나무의 새 잎처럼 파릇하게 반짝인다. 흔히 생명의 기운은 불그스름하게 묘사하는 것이 통상적이지만 천재화가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28세 연하의 연인 마리 테레즈 발테르의 얼굴을 푸른 톤으로, 고혹적인 입술은 개나리색 노랑으로 칠했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로 500년 가까이 그림의 정석으로 지켜져 온 원근법도 과감히 깨뜨린 피카소는 명암의 대비 효과를 쓰지 않고도 색채 만으로 마리 테레즈에게 볼륨감을 불어넣었다. 반복적으로 사용한 곡선들이 율동감과 함께 여성성을 드러낸다.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한창인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 전시 전경. /조상인기자


피카소가 1937년 1월에 그린 ‘마리 테레즈의 초상’이 한국에 왔다.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막한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을 위해서다. 프랑스의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이 소장한 유화와 판화, 조각과 도자 등 110여점이 전시장을 꽉 채웠다. 1900년부터 말년까지 피카소의 70년의 작업을 아우르는 작품들이다. 한국에서 열린 피카소 단일 전시로는 단연 최대 규모다.

피카소의 여인은 왜 일그러졌나?


전시는 연대기적 구성으로 총 7개의 주제로 나뉜다. 그 중 다섯 번째 섹션은 ‘피카소와 여인’이다. 마리 테레즈의 초상도 여기에 걸렸다. 피카소는 화려한 여성 편력 뿐만 아니라 어떤 연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시기별 작품 경향도 확연히 변화했던 작가다.

파블로 피카소 '만돌린을 든 남자' 1911년작 유화 /사진제공=비채아트뮤지엄 ⓒ 2021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절친했던 친구를 잃고 우울한 청년기의 ‘청색시대’(1901~1904년)를 보내던 피카소는 동갑내기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면서 밝은 ‘장미시대’로 화풍이 바뀌면서 입체주의(큐비즘)의 서막을 열었다. 피카소의 대표작 ‘아비뇽의 처녀들’에 모델로 등장한 이가 바로 올리비에다. 두 번째 연인 에바 구엘도 피카소의 작품에 많이 등장했지만 주로 기타나 바이올린 같은 악기로 표현됐다. 첫 부인인 올가 코클로바는 러시아 발레단의 무용수 출신으로 긴 팔다리와 몸의 곡선이 무척 아름다웠는데, 그 영향인지 피카소의 그림도 프랑스의 고전주의 화가 앵그르 풍으로 바뀌었을 정도다. 마리 테레즈는 올가와의 결혼 생활 중에 만나 10년이나 불륜을 지속했던 숨겨진 여인이었다. 1926년에 처음 만난 마리 테레즈는 감춰진 얼굴, 숨은 기호로 그림에 등장하다가 점차 정식(?) 인물로 나타났다.

파블로 피카소가 마리 테레즈를 모델로 그린 1936년작 '시계를 찬 여인' ⓒ 2021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전시장에 걸린 ‘마리 테레즈의 초상’이 청신한 아름다움을 뽐내기는 하나, 피카소의 여인들은 하나같이 일그러져 있다. 이는 입체주의(큐비즘)의 서막을 연 천재 예술가의 연인이 겪어야 할 숙명이었다. 피카소는 26세이던 1907년 다섯 명의 누드 여인을 등장시킨 ‘철학적 매춘부’를 그렸고 1916년 세상에 첫 선을 보였다. 뉴욕현대미술관(MoMA)가 소장한 그 유명한 걸작 ‘아비뇽의 처녀들’이다. 인물의 이목구비는 변형되고 몸통은 찢긴 듯 뒤틀려 있는 입체주의의 첫 그림이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내려온 원근법의 전통이 단일한 시점에서의 화면을 구현한 것과 달리 입체주의는 한 화폭에 여러 방향에서 본 모습을 다 담아낸다. 새로운 창작을 위해 고민했던 피카소는 “나는 보는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대로 그린다”고 선언했고, 이후로도 평생 이같은 도전은 계속됐다.

파블로 피카소 '팔짱을 끼고 앉아있는 여인' 1937년작 유화 /사진제공=비채아트뮤지엄 ⓒ 2021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전시된 ‘시계를 찬 여인’은 마리 테레즈를 그렸지만 거울을 들여다보며 우울해 하는 측은한 모습이다. 보라색으로 살결을 표현하고 인체를 자유자재로 해체한 피카소의 기량은 돋보이지만 말이다. 또다른 전시작 ‘팔짱을 끼고 앉아있는 여인’도 마치 청색시대의 피카소를 보는 듯 푸른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심지어 ‘창문 앞에 앉아있는 여인’에서 젊은 마리 테레즈는 백발 할머니로 묘사됐다. 이 작품들이 그려진 1937년을 끝으로 피카소는 마리 테레즈를 떠났다. 그림은 마치 이별을 암시하는 듯 절묘하다.

파블로 피카소 ‘창문 앞에 앉아있는 여인’ 1937년작 유화 /사진제공=비채아트뮤지엄 ⓒ 2021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그 해 피카소는 초현실주의 여류 사진작가 도라 마르와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다. ‘팔레트에 여인의 두상’에 그려진 여인이 도라 마르다. 도라 마르는 스페인 내전부터 한국전쟁까지 치르며 피카소가 반전(反戰) 예술을 펼치던 모든 순간 작가의 곁에 있었고, 전쟁의 잔혹함을 상징하며 절규하는 ‘우는 여인’의 모델이 됐다.

파블로 피카소가 도라 마르를 모델로 그린 1941년작 '모자 쓴 여인의 상반신' ⓒ 2021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파블로 피카소가 연인 도라 마르를 모델로 그린 1944년작 '파란 모자를 쓴 여인의 상반신' ⓒ 2021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나는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작품 안에 집어 넣는다. 그 안에서 제자리를 찾아가는 일은 그것들의 몫이다.”

피카소가 1935년에 남긴 말이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서순주 커미셔너는 “피카소의 삶과 예술은 그가 함께한 여인들을 통해 만들어졌고 그 여인들과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면서 예술은 변모하고 발전했다”면서 “올리비에는 장미시대와 입체주의 시대를 열었고, 에바 구엘은 입체주의를 꽃피웠으며, 올가는 고전주의 시대를 함께 했고 마리테레즈와 도라 마르는 초현실주의 시대의 동반자였다”고 설명했다.

‘한국에서의 학살’ 처음 한국 전시


피카소가 보여준 ‘반전 예술’의 대표작은 1937년에 그린 ‘게르니카’다. 고국 스페인에서, 내전 중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전쟁 폭력에 희생 당하는 무고한 민간인을 가장 참혹하게 드러내 경종을 울렸다. 또 하나는 1946년작 ‘시체구덩이’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 정권이 자행한 유대인 집단학살의 비극을 그린 작품이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마드리드의 국립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에, ‘시체구덩이’는 모마에 소장돼 있다.

파블로 피카소가 1951년 한국전쟁을 모티브로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 /사진제공=비채아트뮤지엄 ⓒ 2021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이어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의 참상을 전해 들은 피카소가 1951년 ‘한국에서의 학살’을 완성했다. 도 제작 70년 만에 처음 한국으로 왔다. 황해도 신천에서 자행된 미군의 폭격과 양민 학살을 다룬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실제 작품은 인물과 지역을 특정하기 보다는 추상화 한 표현을 통해 전쟁의 잔혹함이 갖는 보편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은 피카소가 이례적으로 한국이라는 특정 국가명을 제목에 쓴 사례이며, ‘게르니카’ ‘시체구덩이’ ‘한국에서의 학살’은 전쟁 공포가 탁월하게 묘사된 ‘피카소의 3대 반전미술품’으로 꼽힌다.

그림 왼쪽에는 벌거벗은 여인들이 울부짖고 있으며, 임신한 여인은 아이를 끌어안거나 자신의 몸 뒤로 아이를 숨기고 있다. 오른쪽의 군인들은 중세풍의 투구부터 로봇같은 사이보그의 몸까지 갖고 있어 과거에도 있었던 전쟁의 잔인함이 미래에도 계속될 것만 같은 상황을 암시한다. 전시는 8월29일까지.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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