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들어 열린 몇 차례의 한미정상회담 중 이번만큼 국민들이 마음 편하게 회담 결과를 지켜본 적도 없는 듯하다. 북한 핵이나 코로나19 백신 성과를 두고 갑론을박은 있지만 적어도 우리가 미국에서 일본보다 대접받는 모습만큼은 코로나19로 지친 국민들에게 위로가 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최고의 순방, 최고의 회담”이라며 소감을 밝혔는데 문 대통령의 평소 절제된 어법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우리 손에 든 비장의 카드가 제법 묵직해서였을까. 임기를 불과 1년 앞둔 문 대통령이 한미 미사일 지침 해제 등 기대 이상의 성과를 들고 왔다는 평가도 나온다.
지금이야말로 이념에 가린 거울이 아니라 진실의 거울 앞에 우리의 자화상을 들여다봐야 할 때다. 정상회담의 주역들이 해외에서는 귀한 손님(貴賓) 대접을 받는데 정작 국내에서는 홀대받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세 번이나 ‘생큐’를 연발했던 우리 기업들 얘기다. 400억 달러의 대미 투자로 안보 동맹을 넘어 굳건한 경제 동맹을 이끌어내는 일등 공신 역할을 했지만 회담이 끝나고 나니 또다시 과소 평가되는 모습이다. 아니나 다를까 여권은 자화자찬 일색이다. 여당 대표는 이번 회담을 두고 “대한민국 위상이 달라졌다”고 말했고 원내대표는 “국격이 뿜뿜 느껴진다”고 으쓱해했다. 우리의 국격(國格)을 드높이고 국부(國富)를 창출하는 데 막중한 역할을 한 주인공이 누구인지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 우리는 미중 패권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샌드위치가 될 뻔한 처지였다. 북한을 움직일 수 있다는 한반도 중재자론도 효력을 잃었고 발 빠르게 움직이는 미일 동맹에 밀려 한미 동맹의 가치는 퇴색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불거졌다.
글로벌 경제 전쟁 포성이 짙은 가운데 한국의 ‘전략적 가치(strategic value)’를 한껏 높여준 것이 바로 우리의 반도체·배터리·자동차 기업들이다. 바이든 정부가 전개하는 대중국 견제에는 K반도체가 지원군 역할을 했고 미국 자동차 회사에는 K배터리가 파트너가 됐다. 삼성전자가 백악관 손님으로 초대받았고 미국 정부가 앞장서 한국 배터리 기업 간 분쟁을 조정할 정도로 우리 기업의 위상은 높다.
이번 정상회담 일정에서도 우리 기업인을 향한 미국의 파격적 환대는 놀라웠다. 당초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에만 참석 예정이었던 기업인들이 백악관에 깜짝 초청됐고 몇몇 기업인들은 이 때문에 한국행 비행기 티켓 시간까지 변경했다고 한다. 백악관 기자회견장에서 누가 한국 대통령과 국민들의 어깨를 으쓱하게 했는지 한 번쯤은 곱씹어봐야 한다.
박제화된 이념에 갇힌 정치인들은 기업의 미국 투자는 원래 예정돼 있었고 떠오르는 미국 시장에 투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쉽게 말할지 모른다. 이번 투자는 기업을 백안시하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초격차 전략을 앞세워 연구 개발과 고용 창출에 앞장선 기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난 4년간 ‘기업 때리기’를 통해 표심 얻기에 급급했던 청와대와 여당은 이제라도 시력 교정을 해야 한다. 기업 경쟁력이 일국의 외교력을 좌우하는 새로운 글로벌 질서가 형성되고 있다. 한미정상회담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증명하는 자리였다. 미중 갈등 속에서 이 같은 흐름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기업 경쟁력을 스스로 갉아먹으면 과연 우리가 내세울 카드가 무엇일지 자문해야 한다.
시들어가는 기업의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을 일깨우고 이를 외교적 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청와대와 정부·여당이 화답해야 한다. 중대재해법 보완을 비롯해 실질적인 규제 완화와 노동 유연성 확보 등 기업들의 절절한 요구에 응답해야 한다. 켜켜이 쌓인 규제 속에 지금처럼 경영의 불확실성이 거듭되면 우리의 경쟁력은 야금야금 사라질 게 뻔하다. 글로벌 기술 전쟁터에서 기업들이 외롭게 싸우게 내버려두는 실수를 더 이상은 범하지 말아야 한다. 문 대통령이 기업들의 어깨를 다독이며 박수를 보내야 할 때다.
/윤홍우 기자 seoulbird@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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