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반도체·에너지 등 미래 성장 동력을 확충하고 탄소 중립과 기후변화, 감염병 대처 등 글로벌 이슈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국정 운영 과정에 과학기술 문화가 자리 잡아야죠.”
윤석진(62·사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은 7일 서울 홍릉 사무실에서 가진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내년에 들어서는 차기 정부가 국정 운영에서 과학기술을 좀 더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과학기술 없이는 모든 게 구호에 그칠 우려가 크다”며 이같이 말했다. 윤 원장은 “만약 차기 정부가 과학기술부총리제를 부활시킨다면 과학기술 기반 사회를 위한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며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통합적인 국가 전략을 수립하고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KIST는 정부출연연구기관의 맏형으로서 남이 안 하는 연구,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융합 연구를 선도해 주요 국가 전략을 뒷받침하겠다”고 의욕을 보였다.
-출연연의 맏형인 KIST 수장으로서 우리 사회가 과학기술 중심 문명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해왔는데.
△융복합이 이뤄지고 급변하는 세상에서 과학기술을 빼놓고 미래를 생각할 수 없다. 기술 변화를 예측하고 이를 촉발시킬 우리의 연구 성과가 뿌리내릴 수 있는 사회구조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과학기술 중심 문명을 만들어가야 한다. 특히 국정 운영에서 과학기술이 중요하게 고려돼야 한다. 과학기술계는 사회의 핵심 이슈 해결과 미래 먹거리 준비를 위해 매진해야 한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우리가 빅데이터와 계산 과학을 활용한 방역 정책으로 나름 성과를 거뒀다. 앞으로도 탄소 중립과 기후변화 대응, 디지털 전환 등의 국정 현안 해결을 위해 과학기술 기반 의사 결정이 이뤄져야 한다. 각종 재난·재해, 점점 지능화하고 있는 신종 범죄로부터 국민을 지킬 수 있는 과학기술도 절실하다.
-내년 3월 9일 실시되는 대선을 앞두고 대선 주자들이 과학기술 중심 문명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면 좋을 텐데.
△맞다. 과학기술 없이는 미래 성장 동력 확보도 구호에 그칠 우려가 크다. 반도체·자동차·조선 등 전통 주력 산업 외에도 첨단 소프트웨어·바이오·환경 기술 등에서 성장 동력을 발굴하고 수출 품목을 다변화해야 한다. 10~20년 뒤를 내다보고 첨단 과학기술 분야에 과감히 투자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출연연이 첨병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차기 정권에서 과학기술부총리를 부활시키자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올해 민간 기업을 포함해 연구개발(R&D) 100조 원 시대에 접어들었다. 2019년 일본의 첨단 소재 수출 규제로 촉발된 소재·부품·장비 위기를 시작으로 코로나19 극복, 기후변화 대응 등 최근 몇 년 사이에 굵직한 과학기술 이슈들이 부상했다. 이들 위기는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통합적 시각에서 과학기술 전략을 제시할 수 있는 ‘컨트롤타워’ 기능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기부총리를 부활시킨다면 과학기술 기반 사회를 앞당기는 데 중요한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이 중심이 돼 범부처에 산재해 있는 정책을 총괄하고 통합적인 국가 전략을 수립·추진할 수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출연연 통폐합 등 구조 조정 얘기가 나오다가 사라졌는데.
△과기부총리제가 부활하면 출연연 시스템의 변화를 촉진하고 새로운 활력 방안을 찾는 쪽으로 이어질 것이다. 출연연은 대학·기업과 차별화되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두려움 없이 나서야 한다. 과기부총리를 정점으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출연연의 육성·지원을 미션으로 하는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등이 안정적인 거버넌스를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출연연의 쇄신은 급변하는 글로벌 환경에서 국가 전략을 효과적으로 실행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출연연도 대학처럼 남을 따라가는 연구를 많이 해왔는데.
△취임한 지 1년이 다가오는데 선도형 R&D 모델을 도입하기 위해 쉼 없이 달려왔다. 해야만 하는 연구에 거침없이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평가 제도를 손보는 데 역점을 뒀다. 먼저 S~D 5단계의 기존 평가 등급을 S·A의 2등급으로 간소화했다. 연구자들이 논문·특허·기술료 중심의 양적지표에 매달리지 않고 적극 도전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들기 위해서다. 물론 최소한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연구자에 대해서는 D등급을 부여한다. 연구 특성에 따라 최대 3년까지 평가 주기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 단기 성과에 매달리지 않도록 했다. 연구 목적에 따라 맞춤형 평가 지표를 선택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도전적 연구 과정을 성과로 인정해주는 ‘그랜드 챌린지’ 사업을 추진해 연구자 사이에 호응을 얻고 있다.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연구자가 마음껏 도전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한다.
-기술 사업화를 위해 역점 과제로 추진한 것은 무엇인가.
△오디션형 창업 아카데미를 운영해 창업 분위기도 만들어가고 있다. 예비 창업팀은 4라운드로 구성된 경진 대회에 출전하고 단계마다 벤처캐피털의 교육·컨설팅을 받는다. 이번에 지원팀이 133개나 돼 고무적이다. 파괴력 있는 창업을 위해서도 선도형 R&D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 재작년 과학기술계의 노력으로 출연연이 기타 공공 기관 분류 중 연구 목적 기관으로 지정되며 자율성을 보장받기 위한 기회를 새로 갖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인력 운영과 예산 편성 등 연구 기관의 특수성이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블라인드 채용과 정규직 확대 정책은 출연연의 상황에 맞게 탄력적으로 운영돼야 한다.
-출연연이 국민 삶의 질 개선과 미래 성장 동력 확충의 컨트롤타워가 돼야 하는데 부족하다는 지적도 많다.
△그런 말씀을 듣고 있다. 올해 기후·환경 분야를 다루는 신규 전문 연구소를 출범시키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탄소 중립 실현과 기후변화 문제 해결은 출연연이 빼놓을 수 없는 연구 과제다. 미래 성장 동력 확충을 위해 첨단 기술 기반 연구소를 창업 중심 모델로 탈바꿈시켜야 한다. 이미 연구자의 창업 문턱을 낮춰 지난해에만 7건의 KIST 창업이 이뤄졌다. 매주 목요일 열리는 창업 카페에 대한 연구자들의 관심도 높다. 창업을 두려워했던 연구 현장의 분위기도 바뀌고 있다. 출연연 기술을 토대로 한 ‘유니콘 기업(기업 가치가 1조 원 이상인 스타트업 기업)’을 만들어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과기정통부나 교육부 등 정부 부처의 규제로 인해 해결하지 못하는 게 있다면.
△대학과 연구 기관 간 연구 협력을 위한 인력 교류 방안을 들 수 있다. 미국에서는 국가 연구소 연구원이 대학교수를 겸직하는 사례가 일반적이다. KIST도 인근 고려대·경희대 등과 이른바 ‘듀얼 포지션(dual position)’ 제도를 마련해 새로운 학연 협력 모델을 만들었다. 하지만 추진 당시 산학협력법에 근거 규정이 없어서 난관에 봉착했다. 이후 시행령이 개정돼 학연 교수 제도를 운영하게 됐으나 여전히 대학에서 KIST 연구원이 정교수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대학과 출연연의 벽을 허물기 위한 시도를 장려해야 한다.
-KIST의 미래상을 어떻게 잡고 있나.
△KIST는 글로벌 최고 수준의 연구를 통해 세계에서 인정받아야 한다. 국민 삶의 질 개선과 사회적 난제 해결을 통해 국가에 헌신해야 한다. 이를 통해 세계적 연구소로 도약시키는 것이 목표다. KIST 미래위원회도 구성해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연구 영역을 발굴하고 자율과 책임을 근간으로 하는 조직 문화 혁신에 나설 방침이다.
-다른 출연연이나 대학들과의 융합 연구를 확대하는 방안은.
△KIST는 다른 출연연들과 달리 다학제 융합 연구 역량을 갖추고 있다. 개방형 혁신을 통해 다른 기관들과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기초와 응용이라는 경계를 벗어나 다른 출연연이나 대학이 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 정답이 없는 세계 최초 분야를 개척하고 선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실제로 차세대 양자 기술 개발과 노화 세포 치료를 목표로 각각 표준연구원·생명과학연구원과 협력하고 있다. KIST 뇌과학연구소는 뇌연구원과 기초과학연구원(IBS) 뇌연구그룹과 활발하게 협력하고 있다. KIST는 지난해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융합연구단 사업을 주관해 긴급 의료와 산업재해 현장에서 보호 시스템을 마련하는 ‘안전 증강 연구’ 과제를 수주하기도 했다. KIST는 동북아 지역 초미세먼지 문제 해결을 위해 대규모 협력 연구도 추진하고 있다.
-KIST가 홍릉 특구 활성화를 위해 나서는 것도 눈에 띈다.
△홍릉은 지난해 서울시 최초의 강소연구개발특구로 지정돼 세계적인 바이오 클러스터로 도약하기 위한 전기를 마련했다. 홍릉에는 바이오·메디컬 분야에 강한 KIST뿐 아니라 동·서 의학을 모두 다루는 경희대와 임상에 강한 연구 중심 병원을 가진 고려대가 있다. 이런 장점을 활용해 의료 현장에 기반한 기술 수요를 발굴하고 병원과 협업해 연구와 기술이전을 강화할 것이다. 사실 특구 추진 과정에서 지역 균형 발전에 대한 일각의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홍릉의 임상·중개 연구 역량을 타 지역의 생산기술, 인증·평가 역량과 결합해 바이오산업의 전 주기 가치 사슬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하겠다.
He is···
1959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 연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8년 KIST에 들어가 탁월한 연구 실적을 내며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 논문 210편을 쓰고 200억 원 이상의 기술이전 실적을 달성했다. KIST에서 미래융합기술연구본부장·연구기획조정본부장·부원장 등 주요 보직을 거쳐 현재 원장을 맡고 있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초대 융합연구본부장으로서 1,400억 원 규모의 융합연구단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이달의 과학기술인상, 국무총리표창, 과학기술포장 등을 받았고 현재 한국공학한림원 정회원이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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