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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기름집’ SK이노베이션의 선언…“탄소 말고 그린으로”


지난 1962년 출범한 옛 대한석유공사(유공)를 모태로 하는 국내 최초·최대 정유 사업자인 SK이노베이션(096770)이 사업의 중심축을 화석연료 기반에서 친환경 그린 에너지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위해 배터리 사업 분할을 추진하고 앞으로 5년간 배터리를 비롯한 그린 사업 분야에 총 30조 원을 쏟아붓기로 했다. 전기차 배터리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시기에 선제적인 투자를 통해 글로벌 톱티어 배터리 제조사로 도약하겠다는 전략이다. 폐플라스틱 화학적 재활용 분야에도 과감하게 투자해 친환경 소재 기업으로 성장하겠다는 청사진도 제시했다.

김준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은 지난 1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개최한 ‘스토리 데이’에서 “오는 2025년까지 전기차 배터리와 핵심 소재인 분리막 등에 30조 원을 투자해 자산의 70%를 그린 자산으로 채우겠다”며 “탄소에서 그린으로 회사 정체성을 완전히 바꾸겠다”고 강조했다. 탄소 배출량이 많은 원유 정제 사업으로 수십 년을 영위해온 기업이 탈(脫)탄소, 저(低)탄소 사업을 추구하겠다고 공식 선언한 것이다. 김 총괄사장은 “탄소 기반 비즈니스가 근본적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며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거센 위협을 새롭게 도약하는 기회로 삼겠다”고 강조했다. SK이노베이션은 석유로 대표되는 화석연료 기반 사업 비중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친환경 사업 비중을 극대화할 계획이다. 2016년 기준으로 6%에 불과한 친환경 그린 자산 비중을 2025년 70%로 대폭 확대하겠다는 방침이다.

‘60년 기름집’ 그린 기업으로 정체성 전환

SK이노베이션이 앞으로 5년간 친환경 그린 사업에 투자하겠다고 밝힌 30조 원은 최근 5년간 전체 투자 금액의 두 배 수준이다. 전기차 배터리 18조 원을 비롯해 배터리 핵심 소재인 분리막에 5조 원, 폐플라스틱 100% 재활용 등 그린 사업 전환에 7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했다. 김 총괄사장은 “배터리 사업을 중심으로 연관 산업을 지속적으로 성장시키겠다”고 말했다.

지동섭 SK이노베이션 배터리사업 대표가 1일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열린 ‘스토리 데이’ 행사에서 배터리 사업에 향후 5년간 18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사진 제공=SK




전기차 배터리 18조 원 투자는 SK이노베이션이 글로벌 톱티어 배터리 업체로 급부상할 수 있는 날개를 달아줄 것으로 전망된다. 2017년에야 본격적인 전기차 배터리 투자에 나선 SK이노베이션은 시장에서 후발 주자로 통한다. 글로벌 배터리 생산 능력은 40GWh로, LG에너지솔루션(120GWh)에 비하면 3분의 1 수준이다. SK이노베이션은 과감한 배터리 투자를 통해 생산 능력을 2025년에 현재의 다섯 배 규모인 200GWh로 늘리고, 2030년에는 500GWh로 확대할 계획이다. 이는 순수 전기차 약 712만 대를 생산할 수 있는 규모다. 지난해 전 세계에서 판매된 전기차 수가 294만 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공격적인 목표치다.

SK이노베이션은 이미 전기차 배터리 수주 잔액이 1,000GWh를 넘어섰다며 수익 구조도 빠르게 개선될 것으로 기대했다. 금액으로 치면 130조 원 규모다. 전 세계적으로 수주 잔액이 1,000GWh 이상인 곳은 중국 CATL과 LG에너지솔루션 정도로 알려져 있다. SK이노베이션이 수주 잔액을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영업이익 흑자 전환도 내년이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지동섭 배터리사업 대표는 “내년 말이면 월 판매량 기준으로 세계 3위에 올라설 것”이라며 “이렇게 되면 수주와 매출 모두 글로벌 톱3 업체로 도약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폐플라스틱 리사이클링도 본격화

분리막 사업 계열사인 SK아이이테크놀로지(SK IET)도 5년간 5조 원을 투자해 생산 능력을 현재 14억 ㎡에서 2025년 40억 ㎡로 확대할 계획이다. 분리막은 양극재·음극재·전해질과 함께 배터리 4대 핵심 소재로 꼽힌다. SK IET는 이미 중국과 폴란드에서 동시다발적인 증설 작업을 하고 있다. 올해 3,000억 원 수준인 상각 전 영업이익(EBITDA)이 2025년에는 1조 4,000억 원까지 올라설 것으로 보고 있다.



‘제2의 분리막’으로 낙점한 폐배터리 재활용(BMR) 사업도 2024년 상업 생산에 들어간다. ‘배터리에서 배터리를 캔다’고 불리는 BMR 사업은 버려진 배터리에서 수산화 리튬을 회수하는 사업이다. 수익성 측면에서 뛰어나다는 평가다. SK이노베이션은 54건의 특허를 출원해 이 분야에서 가장 앞서 있다고 강조했다.

폐플라스틱 화학적 재활용 등 기존 사업을 그린화하는 데도 7조 원을 투자한다. SK종합화학은 친환경 제품 비중을 2023년 50%, 2027년에는 100%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SK이노베이션 차원에서 배터리·분리막 사업은 2035년 넷제로를 조기 달성하고, 전체적으로는 2050년 이전까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나경수 SK종합화학 사장은 “2025년이면 그린 사업이 전체 이익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CEO가 말한 변신의 이유

SK이노베이션이 60년 만에 완전 다른 기업 체질로 탈바꿈하려는 것은 속된 말로 ‘자의 반, 타의 반’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총괄사장은 분할 후 상장 등을 통한 지분 매각 추진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해 설명했다. 첫 번째는 신사업 투자를 위한 재원 마련이다. 두 번째는 기업의 ‘탄소 익스포저’ 자체를 줄여야 하는 목표가 있다고 털어놨다. 지분율을 낮춰야 탄소 익스포저가 떨어진 수 있다는 설명이다. 특히 정유화학 사업의 경우 지분율을 그대로 가져가면서 탄소 배출을 저감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김 총괄 사장은 이를 “자산 리밸런싱”이라고 표현했다.

김 총괄 사장은 고민 거리도 털어놨다. 그는 “중요한 건 우리가 카본 비즈니스를 하면서 사회에 네거티브 영향(탄소 배출)을 주는데, 그걸 매각한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냐는 문제가 있다”며 “누군가는 이를 해결해야 하고, 그런 측면에서 지금까지 카본 비즈니스를 해왔던 우리가 최대한 해결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기본적으로 카본 비즈니스에 대한 설비 투자나 인수합병(M&A)이 굉장히 어려운 환경이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밸류에이션을 높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준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이 1일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열린 ‘스토리 데이’ 행사에서 사업의 중심축을 탄소에서 그린으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하고 있다./사진 제공=SK


구체화되는 최태원의 ‘파이낸셜 스토리’

SK이노베이션이 배터리 사업과 석유개발(E&P) 사업 분할 추진을 공식화하면서 과감한 지분 매각과 지배구조 개편을 통해 투자 재원을 확보하고, 이를 미래 성장 동력 사업에 투자하는 SK그룹 경영 스타일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강조해온 ‘파이낸셜 스토리’ 이행을 위해 비주력 자산을 매각하고 핵심 자산을 유동화하는 등의 지분 거래가 그룹 차원에서 활발했기 때문이다. 파이낸셜 스토리는 단순히 재무상의 목표 달성뿐 아니라 투자자 등 이해관계자들이 공감할 만한 성장 전략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으로 최 회장이 던진 경영 화두다.

이날 SK이노베이션은 배터리·석유개발 사업 분할 시점과 방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SK이노베이션이 분할의 전제 조건으로 자체적인 이익 창출 능력을 강조해온 만큼 이르면 연내 추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이날 지동섭 배터리사업 대표가 “올 3분기면 상각 전 영업이익(EBITDA) 기준으로 흑자 전환이 가능할 것”이라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내년에는 연간 기준으로 영업이익 흑자 달성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지 대표는 “대규모 투자를 위해서는 가급적 분할과 기업공개(IPO)가 빠르게 추진될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사진 제공=SK


배터리와 석유개발 사업 분할은 결국 신규 사업 투자 재원 확보를 위한 사전 작업이다. 향후 IPO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조(兆) 단위의 투자금을 유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분할 방식도 인적 분할이 아닌 물적 분할이 유력하다는 관측이다. 이렇게 되면 지주사인 SK㈜-SK이노베이션-SK배터리(가칭)·SK종합화학·SK에너지·SK루브리컨츠 등의 지배구조가 형성된다. 배터리 사업을 분할해 자회사로 두고 IPO로 지분 일부를 매각해 지분율을 떨어뜨리더라도 사업을 키우는 데 집중하겠다는 의미다. 김 총괄사장은 보유 지분 등을 활용한 투자 재원 마련 경영 방식을 이날 “에쿼티 플레이(Equity Play)”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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