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신용 평가사 피치가 고령화 리스크를 반영해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을 2.3%로 0.2%포인트 떨어뜨렸다. 또 사상 처음으로 대북 리스크가 아닌 국가 채무를 신용 등급 하방 위험 요인 맨 앞 순위로 지적했다. 노인 부양을 위한 재정 부담이 점차 커지는 상황에서 재정 지출이 생산성을 높이는 데 쓰이지 못한다면 국가신용 등급 추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인 셈이다.
피치는 22일 빠른 고령화를 이유로 한국 경제의 ‘기초 체력’인 잠재성장률을 2.5%에서 2.3%로 하향 조정했다. 잠재성장률은 물가 상승을 유발하지 않으면서 달성할 수 있는 최대 성장률을 뜻한다. 피치는 지난 2018년 ‘이머징마켓의 성장 잠재력에 관한 투자와 인구 통계’ 보고서에서 우리나라의 2017~2022년 잠재성장률 평균을 2.5%로 예측했다.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과 고령화로 생산 가능 인구가 빠르게 감소하면서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계속 하락하는 추세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6월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이 2021~2030년 2.5%에서 2031~2041년에는 2.0%로 낮아지고 2041~2050년에는 1.7%까지 떨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은행은 2.7~2.8%로 추정하다 2019년 2.5~2.6%로 조정한 바 있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생산 가능 인구가 계속 줄어드는 만큼 잠재성장률 하락은 불가피하다”며 “이 같은 부분을 피치가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피치는 “정부가 잠재성장률 우려를 상쇄하기 위해 대규모 재정 투입을 통한 한국판 뉴딜을 발표했지만 아직 얼마나 긍정적인 효과를 줄지 평가하기에는 이르다”고 덧붙였다.
특히 피치는 “가파른 국가 채무 증가 속도는 인구 감소와 맞물려 재정 운용상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며 재정 건전성에 대해 경고했다. 재정 지출 리스크가 앞으로 얼마나 커질지는 생산성과 잠재성장률에 달렸다고 평가한 것이다. 이전까지 피치는 하방 리스크로 제일 먼저 한반도의 긴장을 꼽았으나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재정 적자와 국가 채무 비율 증가를 더 큰 위험 요인으로 지목했다. 현 정부 들어 거침 없는 확장 재정으로 우리나라의 국가 채무는 2017년 660조 원에서 올해 963조 원으로 4년 만에 300조 원 불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2차 추가경정예산 편성 과정에서 적자 국채 발행 없이 추가 세수로 재원을 충당하고 일부 국채를 상환한 부분은 긍정적으로 봤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채무 비율 전망치가 올해 47.8%에서 47.1%로, 2024년 58%에서 54%로 개선됐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가신용 등급은 AA-로, 등급 전망은 ‘안정적(stable)’으로 유지했다. 강한 대외 건전성, 경제회복력과 양호한 재정 여력, 북한 관련 지정학적 위험, 고령화로 인한 구조적 도전을 균형 있게 반영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2012년 9월 이후 9년 가까이 변화가 없다. AA-는 4번째로 높은 국가신용 등급으로 영국·홍콩·벨기에·대만 등과 같은 그룹이다.
한국의 올해 성장률은 지난달과 같은 4.5%로 전망했다. 코로나19 4차 대유행으로 경기 회복세가 둔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지만 피치는 “사회적 거리 두기 강화에도 백신 보급 가속화와 2차 추경 등에 힘입어 소비 회복세는 하반기에도 지속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와 함께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올해 1차례, 내년 2차례 각각 25bp(bp=0.01%포인트)씩 인상할 것으로 예측했다. 기재부 관계자는 “신평사들의 높은 관심을 감안해 재정준칙 법제화를 적극 추진하고 선제적 재정 총량 관리 노력이 반영된 2021~2025년 국가재정운용계획을 수립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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