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슈퍼카 브랜드 페라리는 지난 6월 반도체 전문가인 베네데토 비냐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최고경영자(CEO)를 전격 영입했다. 당시 비냐 CEO 영입을 주도한 사람은 페라리를 이끄는 존 엘칸 회장으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도 각별한 인연이 있는 인사다. 엘칸 회장이 반도체 전문가를 자동차 회사 CEO로 임명한 것은 인공지능(AI), 자율주행 시대 등을 맞아 반도체 산업이 자동차 분야를 혁신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차세대 슈퍼카로 페라리를 발돋움시키기 위해 이질적인 업종에서 새로운 피를 수혈한 셈이다.
이 부회장이 13일 출소해 삼성의 경영 현장으로 복귀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삼성 내부에서도 다시 활발한 인재 영입이 이뤄질지에 관심이 모인다. 전문가들은 삼성이 기존의 반도체와 스마트폰 사업 등에 이어 새로운 융복합 사업에 도전하려면 외부 인재 영입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아울러 이 부회장이 성장 동력으로 지목한 시스템 반도체는 반도체 설계 등의 분야에서 과감한 인수합병(M&A)으로 신기술을 탑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경묵 서울대 경영학부 교수는 “삼성이 과거에 외부 인재들을 끌어들여 바이오를 육성한 것처럼 신사업에 대한 이 부회장의 니즈가 확실하다면 글로벌 현장에서 적극적인 외부 인재를 영입하는 것이 다시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사법 리스크에 멈춰선 이재용의 인재 영입
재계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와병 이후 경영을 주도하며 글로벌 현장에서 다양한 인재를 끌어모았다. 2018년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경영을 재개한 후 첫 해외 출장지로 유럽·북미를 택해 AI 분야의 글로벌 석학들과 교류하며 최신 트렌드를 파악했고 핵심 인재 영입에도 직접 나서는 등 AI 사업 육성을 위한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는 2018년 AI 로보틱스 분야의 권위자인 다니엘 리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를 삼성리서치로 끌어왔고 다음 해에는 위구연 하버드대 교수를 펠로로 영입했다. 위 교수는 저전력·고성능 AI 프로세서 분야에서 세계적인 석학으로 꼽힌다. 아울러 삼성은 2020년 6월 AI 분야의 권위자인 세바스찬 승 프린스턴대 교수를 삼성리서치 소장으로 영입했다. ‘회사의 미래를 위해 AI 경쟁력을 더욱 빠르게 키워야 한다’는 이 부회장의 강한 의지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이 부회장의 사법 리스크가 다시 고조되면서 삼성의 인재 영입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특히 이 부회장이 수감 중이던 올해는 이렇다 할 외부 인재 수혈이 아예 없다시피 했다. 이런 가운데 삼성전자는 반도체와 스마트폰 분야에서 ‘위기론’이 대두되기 시작했고 이렇다 할 신사업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주식시장에서도 저평가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인재 영입으로 전기차 시장까지 넘보는 애플
삼성이 이처럼 정체된 사이 글로벌 기업 사이에서는 어느 때보다 치열하고 과감한 ‘인재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산업 융복합이 시작되며 자사의 한계를 극복할 새로운 두뇌를 끌어와야 한다는 요구가 어느 때보다 높아졌기 때문이다.
대표적 사례는 애플이 6월에 영입한 울리히 크란츠 전 BMW 수석부사장이다. 크란츠는 1986년 BMW에 입사해 전기자동차 개발을 이끈 베테랑이다. 애플의 크란츠 영입은 오는 2024년 출시를 앞둔 전기자율주행차 ‘애플카’를 염두에 뒀다는 것이 정설이다. 스마트폰 회사 애플의 신사업 밑그림이 인재 영입으로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CNBC는 애플의 크란츠 영입과 관련해 “애플이 테슬라 등 완성차 업체들과 전기차 시장에서 경쟁할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한다는 신호”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미국 제너럴모터스(GM)는 글로벌 통신 장비 업체인 휴렛팩커드(HP)엔터프라이즈 CEO를 지낸 맥 휘트먼을 신임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또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기업 넷플릭스는 비디오게임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페이스북 비디오게임 책임자인 마이크 버두를 게임개발부사장으로 영입하면서 성장 동력을 찾고 있다.
시스템 반도체 1위 위해선 설계 능력 수혈해야
인재 영입과 더불어 2016년 미국 하만 인수 이후 멈춰선 삼성의 M&A 역시 이 부회장이 각별히 신경 써야 할 분야로 꼽힌다.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MS) 등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들은 전 세계에서 경쟁력 있는 스타트업 등을 쓸어 담으며 새로운 서비스를 잇따라 내놓고 있다.
전문가들은 특히 삼성이 2030년 1위를 목표로 제시한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전기차나 자율주행차 반도체 등의 분야에서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과감한 M&A가 필요하다고 본다. 삼성전자 역시 ‘엑시노스 오토’ 등을 개발하며 차량용 반도체 시장에 진출하고 있으나 아직 뚜렷한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 이윤식 유니스트 교수는 “전기차 시대를 맞아 새로운 차량용 반도체 시장이 열리고 있다”면서 “삼성이 기존 주력 분야가 아닌 곳에서 실력을 가장 빨리 키울 수 있는 방법은 결국 M&A이며 이런 측면에서 이 부회장의 경영 복귀가 삼성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재용 부회장 출소 후 행보는
준법·투자·백신. 이 세 단어는 재구속 207일 만에 서울구치소를 벗어나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행보를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가석방이라는 불완전한 신분 탓에 이 부회장의 선택 폭이 극도로 제한된 상태지만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재판 등 사법 리스크가 여전히 남아 있어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활동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재계에 따르면 13일 출소하는 이 부회장은 광복절 연휴 기간에 휴식을 취한 후 오는 17일 8월 정기 회의가 열리는 삼성준법감시위원회를 방문하는 일정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회장은 재구속되기 정확히 1주일 전인 지난 1월 11일 정기 회의를 진행하던 준법위 위원들과 만나 “면담을 정례화하자”고 말했다. 자신의 구속으로 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만큼 가석방 이후 첫 공개 일정으로 준법위를 찾을 것이라는 예측이다. 특검이나 진보 계열 시민 단체들이 준법위의 실효성에 의문을 표했던 만큼 이를 반박하기 위해 ‘준법위의 지속적인 활동을 보장한다’는 이 부회장의 의지를 재차 드러낼지 주목된다. 다만 이에 대해 준법위 관계자는 “관련 일정은 아직 전혀 조율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반도체·배터리와 연계된 투자 행보를 보일 가능성도 높다. 2018년 2월 5일 집행유예 선고로 구속 상태에서 풀려난 이 부회장의 목적지를 상기해보면 더욱 힘이 실리는 추정이다. 그는 당시 산업계의 핫이슈였던 5세대 이동통신(5G)이나 인공지능(AI) 분야를 중점적으로 살피며 그룹의 미래 먹거리를 발굴했다. 같은 해 3월 22일부터 4월 7일까지 유럽·캐나다를 방문해 글로벌 AI센터를 점검하고 5월 초에는 중국·일본의 주요 통신사를 만났다. 재계 관계자는 “현 시점에서 삼성그룹 포트폴리오상 주목해야 할 산업은 반도체와 배터리”라며 “특히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까지 나서 투자를 요청한 반도체 관련 활동이 활발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코로나19 백신도 이 부회장이 염두에 두는 분야로 알려졌다. 가석방 결정 직후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백신 공급의 키를 쥔 다국적 제약사들을 상대로 정부 대신 이 부회장이 협상에 나서달라고 공식 요청했다. 송 대표는 모더나 백신 위탁 생산 기업인 삼성바이오로직스를 콕 집어 언급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가 지난해 12월 전 세계적인 백신 품귀 현상으로 어려움을 겪던 정부를 화이자 고위 임원과 연결했던 만큼 정치권이 이 부회장에게 거는 기대는 크다. 다만 코로나19 백신 공급의 의사 결정권을 쥔 화이자·모더나는 모두 미국 동부에 본사가 있다. 가석방 상태에서 비자가 원활하게 발급될지는 미지수다. 또한 매주 출석해야 하는 형사재판이 잡혀 있어 추석 연휴가 낀 9월 20~25일만 출국이 가능하다는 점도 ‘백신 특사’ 행보에는 걸림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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