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새벽 국회 법제사법위원는 여당 단독으로 ‘언론 중재 및 피해 구제 등에 관한 법률(언론중재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여야 간사간 합의없이 차수조정을 했다며 국민의힘 의원들이 항의하며 퇴장해 여당 의원들만 남았는데도 밤샘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야당과 언론계·학계까지 나서 ‘언론재갈법’이라고 비판하는 법을 여당은 ‘가짜뉴스 피해구제법’이라며 당위성을 하루가 멀다하고 강조하는 중입니다. 일각에선 ‘조국(보도)방지법’이라며 언론의 권력 감시기능을 위축시킨다지만 또 다른 시각에선 고위 공직자와 대기업 및 그 관계자(주요 주주 및 임원)에겐 징벌적 손해배상 청구를 하지 않기에 권력과 자본에 언론이 위축될리는 없다고 반박합니다. 전혀 다른 주장 속에 그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는 일반인 입장에서는 각 진영 논리에 빠져드는 양상인데, 무엇이 진짜 문제일까요.
‘개념’ 정의부터 어긋난 언론중재법
다소 이슈와는 관계없지만 현재 언론중재법과 관련한 여야간 대치에 대해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어 김영민 서울대 교수의 ‘공부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내용을 옮겨봅니다.
‘심화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단어의 기본적인 뜻뿐 아니라 관련된 함의까지 숙지해야 한다. ‘국립’이나 ‘사립’과 같은 단어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대개 국립대학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국립대학은 나라에서 세운 학교이며, 운영에 필요한 재정을 나라로부터 조달할 것이라는 가정을 하시 쉽다. 마찬가지로 사립대학은 민간에서 세운 학교이며, 재정을 민간에서 조달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2010년 지역 국립대 중에서 가장 많은 정부 예산을 받은 곳은 경북대학교였는데 그 액수는 2,126억 원이었다. 반면 사립 연세대학교는 그보다 많은 2,349억 원의 예산을 정부로부터 지원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단어의 기본적인 뜻으로 해소하기 어려운 (정치적)함의가 한국어의 ‘국립’ 혹은 ‘사립’에 담겨 있음을 보여준다. 즉 단어의 기본적인 뜻만 가지고는 그 단어의 복합적인 함의를 충분히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면서 김 교수는 개념 정의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는 ‘대머리를 정의하라’라는 예시로 학생들과의 대화를 인용해 개념 정의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대머리는 ‘머리털이 적은 상태인가’ ‘머리가 작은 소두인은 적은 머리털로도 두피를 가릴 수 있는데..’‘청나라 시절 변발은 대머리인가’ 우스운 소재로 인용했지만 현재 언론중재법을 두고 우리 사회의 대립구도가 결국 서로 다른 개념 정의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수정에 재수정…법안통과는 속전속결
개정안에 대해 야당은 물론 학계와 법조계, 시민단체, 언론계까지 반발하자 민주당은 8월17일 수정안을 내놨습니다. 지난달 국회문화체육관광이 소위를 통과할 때와 달리 △고위 공직자와 기업 임원의 징벌적 손해배상 청구 제외 △열람차단청구표시 조항 삭제 △입증 책임을 원고로 명확히 규정 △손해배상 언론사 매출액 비율 기준 삭제 △구상권 청구 조항 삭제 등을 포함했습니다. 이어 19일 문체위 전체회의를 통과시키면서는 ‘언론사 고의·중과실추정요건’에 대해 아래와 같이 4가지를 제시해 재수정안을 냈습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수정에 재수정안을 내놓자 국민의힘에선 중요 “법률을 붕어빵 찍어내 듯한다”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여당은 수정에 재수정은 언론계와 학계, 야당의 요구를 수용했다고 맞받아 쳤습니다.
언론중재법 개정안 제30조 2의 ‘허위·조작’보도란 무엇일까요. 25일 국회 법사위에선 국민의힘 의원들이 퇴장해 여당 의원들만 남아 논의를 이어가면서도 허위·조작과 관련해 밤샘 토론을 이어가야했습니다. 중대한 과실에 ‘명백한’을 기입한 게 불필요하다(김용민 의원)는 지적과 ‘피해 가중’까지 입증은 필요없다(소병철 의원)는 의견이 제기됐습니다. 또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다(최기상 의원)는 주장과 ‘결과가 중하다해서 고의중과실을 추정할 수 없다’(송기헌 의원)는 문제제기도 이어졌습니다. 법안 문구 간의 충돌문제까지 이어지자 법사위원장 직무대리를 맡고 있는 박주민 의원은 새벽 3시25분 께 판례 등을 찾아보고 신중한 정리를 하자며 정회를 하고 다시 논의를 이어갔습니다.
이 같은 공전은 방송기자연합회·전국언론노동조합·한국기자협회·한국PD연합회가 공동성명을 낼 때부터 예고됐습니다. 이들은 성명을 통해 “자의적 해석과 오남용이 가능한 문제적 골격이 그대로 남아 있어 설계부터 다시 하지 않는 한 ‘허위·조작 정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언제라도 비판적인 언론을 질식하게 하고, 거꾸로 민주당 자신을 겨눌 칼이 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與, ‘잘못된 보도 피해 최소화’…가짜뉴스 피해구제법
민주당은 “언론의 책임성과 자율성을 보장하되 잘못된 보도가 있으면 적절한 구제 장치를 통해 그 피해를 최소화하는 가짜뉴스 피해구제법”이라고 누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야당은 물론 학계와 법조계, 시민단체, 언론계까지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인한 ‘허위·조작’의 모호한 규정에 문제제기를 하고 있지만 여당은 자신합니다.
송영길 민주당 대표는 “무책임한 기사로 기업이 망하고 개인의 삶과 명예가 짓밟혀도 이를 수수방관한다면 같은 잘못은 끝없이 반복된다. 악순환을 과감히 끊어내야 할 때”라고 밝혔습니다. 송 대표는 ‘세월호 천막 가짜뉴스’, ‘쓰레기 만두 사건’ 등 허위 보도 사례들을 열거하며 “엉터리 허위보도로 개인과 기업, 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지속해서 발생했으나 손해배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허위보도 건수는 늘어나고 있다”며 “언론중재법, 가짜뉴스 피해구제법이 필요한 이유”라고 역시 강조했습니다.
권력과 자본에 의해 언론이 위축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개정안 5조2항을 들어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으로서, 진실한 것이거나 진실하다고 믿는 데에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 “언론 보도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다만, 허위·조작 보도란 무엇일까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서 소개한 김영민 교수의 대머리의 개념 정의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인데 지난달 27일 문체위 소위 통과 뒤 본회의까지 달려오는데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피해자 구제는 가능할까
개정안은 언론사의 명백한 고의 또는 중과실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는 요건으로 △보복적이거나 반복적인 허위·조작 보도로 피해를 가중하는 경우 △허위·조작 보도로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입은 경우 △정정보도·추후보도가 있었음에도 이에 해당하는 기사를 별도의 충분한 검증 절차 없이 복제·인용 보도한 경우 △기사의 본질적인 내용과 다르게 제목·시각자료(사진·삽화·영상 등)를 조합해 새로운 사실을 구성하는 등 기사 내용을 왜곡하는 경우를 제시했습니다. 개념 정의가 될까요.
고의·중과실을 개정안에 포함된 단 네 가지로 분류하기란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기준도 모호하고 추상적이라서 ‘삭제’해야 한다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는데도 사법부가 판단할 문제이므로 법률에서 요건을 명시할 필요가 없다는 게 여당의 주장입니다. 한 여권 인사는 “공청회를 하고 야당과 수차례 토론을 해왔는데 모호한 규정에 대해 대안없이 지연작전으로만 일관했다”며 “모호한 규정을 정확하게 해달라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과 다름없다”고 야당에 화살을 돌렸습니다. 야당이 이번 언론중재법에 생산적인 논의를 해왔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만 그럼에도 8월 국회로 한정해 개념 정의조차 어려운 법안을 밀어붙여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피해자 구제는 가능할까요. 도리어 시민이 언론의 고의·중과실을 입증하기는 어려워 효과적인 피해자 구제 방법이 되지 않을 것이란 지적도 나오고 있습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한국의 언론 현실에서 사회적 약자인 일반 시민 피해자가 허위·조작 보도로 인해 자신의 인격권이 침해됐음을 입증하고 더 나아가 그 보도가 언론의 고의·중과실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까지 입증해야 한다면, 고액의 소송비용으로 소를 제기할 가능성이 크게 줄어들 것이다. 법원이 실제 배액배상을 인정할 가능성도 크지 않으니 시민의 피해구제책으로 얼마나 효과적일지 의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수십년 동안 언론개혁 운동을 벌인 시민단체 조차 환영하지 않는 개정안을 언론개혁 이름으로 여당은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권력과 자본’ 감시는 제한되나
언론 현업단체들이 한 목소리를 내며 비판하는 게 또 있습니다. 권력과 자본에 대한 비판 보도에 제한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역시 민주당은 언론 본연의 역할은 보장했다며 반박하고 있습니다. 즉, 법안 심의 과정에서 고위직 공무원과 대기업 간부들은 징벌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도록 대상에서 제외시켰다는 점을 들어 정치·경제권력에 대한 언론의 비판, 감시 권한은 그대로 유지된다는 겁니다.
이 역시 개념정의는 여야가 서로 다릅니다. 민주당은 고위공무원 대기업은 징벌적 손해배상을 아예 할 수 없게 했다했지만 야당은 한계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고위공무원이란 무엇일까요. 대기업 임원은 또 무엇일까요. 전직 공무원은 퇴직공무원은 전직 대통령은 고위공무원인가 아닌가. 대기업 임원 개인과 대기업 법인은 어떻게 다를까요. 이처럼 개념 정의조차 명쾌하지 않다보니 전직 고위공무원과 법인은 의혹 보도에 대해 허위라고 주장하며, 징벌적 손해배상제에 따라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게 야당의 논리입니다. 공무원 가족에 대한 보도도 논란거리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국회의원 부동산 투기 보도에서도 배우자 등 가족 명의 부동산이라면 징벌적 손해배상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법인 명의의 징벌적 손해배상 소송도 가능합니다.
개정안을 통해 여당이 결코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것을 용납할 국민들도 아닙니다. 백번양보해 잘못된 보도에 따른 피해자 구제라는 선한 의지도 믿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개념정의 조차 허술한 허점 투성이 개정안을 여당의 선한 의지라고 믿고 맡길 수 있을까요. 정부여당이 선한의지로 밀어붙인 그동안의 법안들 역시 신통치는 않은 형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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