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뉴 삼성 출사표’를 던졌다.
삼성그룹은 24일 오는 2023년까지 3년간 반도체·바이오 등 전략 사업에 240조 원을 신규 투자하고 4만 명을 직접 고용하는 미래 비전을 발표했다. 이 부회장이 가석방으로 지난 13일 출소한 지 11일 만에 나온 대규모 투자·고용 계획이다. 이는 2018년에 내놓은 180조 원 투자 계획을 뛰어넘는 단일 기업 사상 최대 규모다.
삼성 측은 “향후 3년간은 새로운 미래 질서가 재편되는 시기가 될 것”이라며 “코로나19 이후 예상되는 산업·국제 질서, 사회구조의 대변혁에 대비해 미래에 우리 경제·사회가 당면할 과제들에 대한 기업의 역할을 다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부회장은 메모리와 파운드리 사업부를 포함한 각 사업 부문 최고경영자(CEO)와 연이어 간담회를 가지며 이번 투자·고용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3년간 투자 규모를 240조 원으로 확대하고 이 중 180조 원을 국내에 투자한다. 글로벌 산업구조 개편을 선도하고 과감한 인수합병(M&A)으로 시장 리더십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우선 메모리 반도체 사업은 글로벌 시장에서 절대 우위를 공고히 하고 시스템 반도체는 투자 확대를 통해 세계 1위 도약을 위한 기반을 마련한다는 방침이다.
시스템 반도체의 경우 선단 공정을 적기에 개발하고 기존 모바일 중심에서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등 신규 응용처로 사업을 확대한다. 미국 제2 파운드리 공장을 비롯해 시스템 반도체 부문에만 향후 3년간 최소 50조 원 이상이 투입될 것으로 보인다.
삼성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비해 바이오 사업을 ‘제2의 반도체’로 육성할 계획이다. 현재 건설 중인 4공장이 완공되면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생산능력은 62만ℓ로 세계 1위로 올라선다.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삼성바이오에피스는 앞으로 공격적인 투자 기조를 지속해 위탁개발생산(CDMO) 분야에서 5·6공장을 건설해 글로벌 바이오 의약품 생산 허브로서의 절대 우위를 확보한다는 방침이다.
고용도 늘린다. 통상적인 채용 계획을 따르면 3년간 고용 규모는 약 3만 명이지만 첨단산업 위주로 1만 명가량의 고용을 확대한다. 또 3년간 국내 대규모 투자로 56만 명의 고용·일자리 창출 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주요 관계사들은 국내 채용 시장의 안정성을 위해 신입 사원 공채 제도를 유지하기로 했다.
‘국익을 위한 가석방’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화답했다. 지난 13일 “자신을 둘러싼 걱정과 우려, 기대를 잘 듣고 있다”고 답하며 서울구치소를 걸어 나왔던 이 부회장은 정확히 11일 후 대규모 투자 계획으로 포스트 코로나 대응에 나섰다. 투자와 고용·상생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고루 담은 이번 계획에서는 특히 국가별 대항전이 펼쳐지고 있는 반도체 분야에 강력한 힘을 실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24일 재계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가석방 이후 줄곧 그룹 주요 계열사 사장단과 만나 국익에 부응하는 투자 계획을 내놓기 위해 논의를 거듭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가석방 당일이었던 13일에도 곧장 서울 서초구의 삼성전자 서초 사옥으로 향해 김기남 삼성전자 DS 부문장(부회장) 등 주요 경영진과 머리를 맞댔다. 광복절 연휴가 지난 다음에는 메모리·파운드리 사업부를 포함한 삼성전자 각 사업 부문별 간담회가 잇따라 열렸다. 출소 전 이 부회장이 구상했을 대규모 투자 고용안에 대한 방안을 구체화하기 위한 시간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미국 파운드리 공장 등 투자 속도전
삼성의 이번 투자 결정은 첨단 파운드리 팹 투자에 초점이 맞춰질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제2파운드리 공장을 비롯해 시스템 반도체 부문에만 향후 3년간 최소 50조 원 이상이 투입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세계 곳곳에서 공격적인 반도체 설비투자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첨단 공정 투자에 속도를 내면서 경쟁력을 가져가는 전략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 최근 글로벌 반도체 대기업들은 신규 칩 생산 설비 투자에 한창이다. 올 초 인텔은 ‘IDM 2.0’이라는 전략을 들고 나오면서 고객사 칩을 대신 생산하는 파운드리 사업을 수십 년 만에 재개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 애리조나주에 2개의 신규 팹을 세우고 이곳에서 첨단 파운드리 라인을 운영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세계 1위 파운드리 업체 TSMC는 미국 애리조나주에 첨단 파운드리 공장을 세우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 움직임에 대응해 미국 내 파운드리를 6개까지 늘리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공정에서도 상당히 앞서고 있다. 최근 이들은 3나노미터(㎚·10억분의 1m) 공정 시험 양산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시도하며 퀄컴·엔비디아 등 굵직한 칩 설계 기업의 파운드리 수요에 대응하고 있다.
반면 최근 삼성전자의 투자 소식은 뜸했다. 5월 김기남 부회장이 미국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 당시 170억 달러(약 20조 원)를 들여 미국 현지에 파운드리 투자를 단행한다고 밝혔지만 최종 결정권자인 이 부회장의 부재로 속도감 있는 투자가 진행되지 못했다. 또 인텔의 최신 그래픽처리장치(GPU) 파운드리 물량을 라이벌인 TSMC가 모두 수주하는 등 생산 경쟁력이 밀리고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따라서 이번 투자 발표를 기점으로 삼성전자는 파운드리가 극복해야 할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역량을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미국 파운드리 투자 확정은 물론 평택 신규 반도체 팹인 ‘P3’에 첨단 파운드리 라인을 설치하면서 신규 물량 확보에 주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차세대 3나노 공정 확보를 위한 고급 인력 채용에도 공을 들일 가능성 역시 높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TSMC·인텔·UMC·글로벌파운드리 등 글로벌 업체들이 과거에 없던 적극적인 투자를 진행하고 있고, 투자를 많이 한 회사가 힘이 세지는 것은 당연하다”며 “선제적 투자를 할수록 경쟁력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삼성전자도 투자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메모리 설비투자로 ‘물량 초격차’ 실현
또한 삼성전자는 절대적 우위에 있는 메모리 분야에서 ‘초격차’를 확보하기 위해 과감한 투자도 단행할 것으로 보인다. 경쟁사 마이크론은 극자외선(EUV) 공정을 도입하지 않은 10나노 4세대급(1a) D램을 삼성전자보다 먼저 생산하며 세계 최초 기록을 남겼다. 낸드플래시 분야에서도 후발 주자인 마이크론과 SK하이닉스 등이 176단 제품을 개발 완료하며 추격이 거세다. 업계 관계자는 “차세대 제품을 먼저 개발해야 ‘차차세대’ 제품을 개발할 비용을 제때 확보할 수 있지만, 후발 업체에 밀리기 시작하면 격차를 유지할 만한 여력을 잃기 쉽다”며 “1a D램 경쟁에서 밀린 삼성전자가 해법을 찾아야 할 시기”라고 진단했다.
따라서 삼성전자는 메모리 분야 기술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투자를 대폭 확대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하반기 양산 예정인 14나노 D램 이후의 EUV D램, 200단 이상 낸드플래시의 양산을 앞당기기 위한 인력 채용과 연구개발비 투자를 고심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과감한 메모리 설비투자로 가격 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하는 전략을 취할 것으로 관측된다. 내년 하반기부터 운영할 예정인 P3 메모리 라인을 최대한 신속하게 가동해 마이크론이나 중국 메모리 업체 등이 따라올 수 없는 가격 정책으로 공고한 시장점유율을 가져가겠다는 것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