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의 미술관으로 꼽히는 삼성미술관 리움.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의 수집품 2만3,000여 점이 유족에 의해 국공립 기관에 기증된 후 주목 받은 ‘이건희 컬렉션’의 모태가 된 곳이다.
용산구 한남동 리움이 약 1년 7개월의 새 단장 기간을 거쳐 지난 8일 재개관했다. 이건희 회장의 기증 유지와 드높아진 국민적 문화 향유의 욕구를 고려해 소장품 전시가 ‘무료’로 전환됐다. 4년 만에 열리는 기획전도 올 연말까지 무료다. 코로나19 방역 조치에 따라 시간당 전시관 별 관람객은 25명, 매 시간 75명씩 하루 600명만 입장이 가능한 터라 향후 2주치 관람은 모조리 매진 상태다. 미술관 로고부터 로비 인테리어, 소장품 전시까지 확 바뀐 리움을 다녀왔다.
달라진 리움의 첫인상은 ‘도가도 비상도’로 시작하는 노자 도덕경의 한 구절 ‘현지우현 중묘지문’을 떠올리게 한다. ‘현묘하고 또 현묘하니 모든 오묘함의 문이다’ 라고 해석되는 ‘검을 현(玄)’자의 검정은 색이 사라진 상태이면서도 오만가지 색이 다 담긴 것이기도 하다. 리움의 로비 인테리어는 노자의 ‘중묘지문’처럼 오묘한 검은 색으로 빛난다. 검되 어둡지 않아 꼭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다. 검은 리셉션 데스크는 ‘숯의 화가’ 이배의 설치 작품이다.
발랄함을 더하던 최정화의 설치 작품이 사라진 로툰다(원형 홀)를 올려다보자.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M1의 나선형으로 상승하는 창문들과 둥근 천장이 보인다 싶으나 이게 전부는 아니다. 태양의 움직임, 바람의 세기에 따라 창문 색이 파랗고 붉은 듯 했다가 일렁이는 무지개색으로 채워지기도 한다. 김수자의 ‘호흡’이다. 김수자는 지난 2013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대표로 참가했을 때 이 작품으로 전시장 전체를 감싸버렸다.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가 내려오면서 고미술을 감상하고, 현대미술 전시관으로 이동하는 동선을 추천한다. 고미술 소장품 배치는 지진 등 외부 충격을 막는 특수제작 좌대, 반사 없이 감상할 수 있는 특수 유리 등 설비를 유지해야 했기에 변주가 쉽지 않았다. 대신 국가로 기증된 유물이 빠져나간 자리를 채울 새 유물에 공을 들였다. 국보 6점, 보물 4점 등 총 160점의 유물을 감상할 수 있는데, 14~15세기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시기에 제작된 ‘나전 국화당초문 팔각함’은 첫 공개작이다. 나전공예는 상감청자, 불화와 더불어 정교하고 장식적인 고려 문화의 3대 명품으로 꼽힌다. 세계적으로 희소한 나전 공예품 중에서도 뚜껑 있는 팔각 그릇 형태는 이 한 점 뿐이다.
리움의 고미술 소장품의 백미는 명불허전의 유물 그 자체지만, 이번 전시는 현대미술을 함께 보는 묘미가 있다. 교과서에 수록된 고려청자 ‘청자상감 운학모란국화문 매병’(국보) 뒤로 바이런김의 대형 회화 ‘고려 청자 유약#2’가 걸렸다. 바이런김은 다양한 사람들의 피부색을 그려 색면추상처럼 보이는 ‘제유법’ 시리즈로 인종 문제를 꼬집었고, 이후 ‘청자유약’과 ‘하늘’ 등의 연작을 선보였다. 분청사기와 마주한 자리에는 박서보의 ‘묘법 No-14-81’이 배치됐다. 흰색 물감을 칠한 바탕이 마르기 전에 연필을 이용해 반복적인 선을 그어 완성하는 그의 작업이 분장한 흰 흙을 선으로 긁어내 문양을 그린 분청사기와 공명한다. 조선 왕실을 대표하는 도자기 ‘백자청화 운룡문호’ 옆에는 정상화의 ‘무제 86-2-28’이 놓였다. 초대형 백자 항아리에 청화로 용을 그린 것은 그 자체로 왕실의 위용을 상징하는데, 용의 발가락이 보통 4개지만 이 도자기는 발가락 5개의 용을 품고 있다. 정상화는 고령토를 바른 캔버스 화면에 격자무늬를 내 평면에서도 오묘한 깊이감을 만드는데, 백색 작품의 아래쪽에서 청화빛 푸른색이 서서히 올라오는 색감이 청화백자와 조화를 이룬다. 겸재 정선이 불의에 굴하지 않는 지조의 상징 잣나무를 그린 ‘노백도’ 맞은편에는 원로화가 윤명로의 ‘겸재예찬 M.710’을 뒀다. 국보 고려불화 곁에는 인도계 영국작가 아니쉬 카푸어의 ‘사원’이 전시 중이다.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가 숭고한 예술로 통했다.
현대미술은 건축가 장 누벨이 설계한 M2에서 만날 수 있다. 아니쉬 카푸어, 탐 웨셀만 등의 서양 거장이 차지했던 입구 자리에 중견작가 문범의 작품이 걸렸다. 오일스틱을 바르고 손으로 문질러 작업한 ‘슬로우, 세임(Slow,Same)’ 연작은 실재하지 않는 이상 세계를 그려놓은 듯 한 폭의 거대한 수묵 산수화를 떠올리게 한다. 리움의 현대미술 소장품전은 수백 억 원대 작품을 한 자리에 모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번 전시 개편은 그간 선보이지 않았던, 한국의 보다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 주목한 것이 눈에 띈다. 태현선 리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은 “그동안 현대미술 상설전은 대가 위주로 미술사적 선 굵은 전시를 기획했는데, 그 바람에 20세기 초현실주의를 비롯해 한국의 중견작가 등 보여주지 못한 작품이 많았다”면서 “앞으로는 연대기적 전시 대신 주제가 있는 소장품 기획전을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명품 수집을 넘어 명장과 명작을 스스로 발굴해 성장시키려는 리움의 의지가 읽힌다.
M2전시장 2층은 ‘검은 공백’이라는 제목의 기획전으로 꾸려졌다. 사각뿔 형태를 뒤집어 놓은 탁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미니멀리즘의 정제된 미학을 한껏 품은 토니 스미스의 조각이 대규모 철제 설치작업으로 유명한 리처드 세라의 판화와 조우하고, 최만린의 조각 ‘현(玄)’과 이사무 노구치의 ‘고독’이 공존한다. 검은 작업들이 한 데 모이자 공간 전체에 초월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뒷편에는 화려한 색채 감각으로 유명한 최욱경의 ‘레디와 백조’ 등 흑백 작업들이 걸렸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풍자한 폴 매카시의 ‘설백(雪白) 난쟁이(행복이)’는 유난히 잘 웃고 유쾌한 행복이의 눈·코 등이 짓이겨 있다. 낙천적 인물을 기괴한 형태로 만들어 인간 이면의 어두운 욕망과 폭력성을 꼬집었다.
1층의 ‘중력의 역방향’에서는 빛의 효과, 공간의 재해석을 경험할 수 있다. 마크 로스코, 김환기가 걸렸던 자리에서 로버트 어윈‘의 ’무제‘를 만날 수 있다. 허연 벽에 원반을 걸었나 싶겠지만 흰 원반이 조명등 빛을 받아 네잎 클로버 형태의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담쟁이 덩쿨이 무성한 외벽을 배경으로 놓인 아니쉬 카푸어의 ’프로토 프로토‘는 따로 떼놓은 심장 혹은 태초의 생명체를 상상하게 한다. 용기 안에 액체 상태의 아크릴을 붓는 과정에서 발생한 공기 방울을 작품으로 잡아낸 것인데 우연히 만든 신비한 형태가 숭고함을 경험하게 한다. 제목의 ’프로토‘는 히랍어로 ’최초‘를 뜻한다.
아니쉬 카푸어와 더불어 전시장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이불의 시기별 대표작, 올라퍼 엘리아슨과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은 꼭 챙겨봐야 한다. 한국 기하학적 추상의 거장 이승조와 초현실주의 작가 살바도르 달리,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작품 등 현대미술 출품작 76점 중 절반 이상이 최초 공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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