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금융사들이 발 빠르게 암호화폐 시장에 진입하고 있다. 암호화폐를 미래 새로운 먹거리로 보고, 비트코인 상장지수펀드(ETF)·암호화폐 커스터디 등과 같은 상품 및 서비스 출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국내 금융사들은 암호화폐 투자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 분위기와 금융당국의 규제에 가로 막혀 관련 사업 진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경우 앞으로 커질 글로벌 디지털 가상자산 시장에서 국내 금융사들만 ‘갈라파고스 신드롬’에 빠져 글로벌 경쟁에서 뒤쳐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6일 업계에 따르면 해외 금융사들은 암호화폐를 활용한 다양한 신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글로벌 신용카드사인 비자와 마스터카드는 암호화폐 결제 시스템 구축에 발 벗고 나섰다. 비자는 지난 3월 USD코인(USDC) 결제를 시범 도입했다. USDC는 미국 달러화에 가치가 1대 1로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으로 결제 규모가 급성장하고 있다. 올 상반기 비자카드를 통해 결제된 암호화폐 규모만 10억 달러(약 1조 1,925억 원)에 달한다. 마스터카드도 지난 7월 USDC를 활용한 결제 시스템을 테스트하며 비자를 바짝 뒤쫓고 있다.
비자는 대체불가능한토큰(NFT) 시장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다. 비자는 지난 8월 ‘크립토펑크 #7610' 작품을 15만 달러(약 1억 7,887만 원)에 매입하며 NFT 시장진출을 공식화했다. 쿠이 셰필드(Cuy Sheffield) 비자 암호화폐 부문장은 “고객과 파트너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글로벌 브랜드가 NFT 사업에 뛰어들었다”며 “NFT를 구매, 저장, 활용할 수 있도록 인프라를 구축할 것"이라고 말했따.
미국 은행들도 암호화폐 관련 사업에 속속 진출하고 있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인 뉴욕 멜론은행(BNY Mellon)은 지난 2월 암호화폐 커스터디 시장 진출을 선언했다. 바스트은행(Vast Bank)는 통화감독청(OCC)의 승인을 받고 미국 연방인가은행 중 최초로 가상자산 매매 서비스를 내놨다. JP모건·모건스탠리·골드만삭스 등 투자은행들도 비트코인 펀드 운용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자산운용사들의 움직임은 더욱 활발하다. ‘돈 나무 언니’로 친숙한 캐시우드가 이끄는 아크인베스트를 비롯해 프로셰어, 인베스코 등 주요 자산운용사는 비트코인ETF, 이더리움ETF 신청서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했다. 현재 SEC에 접수된 비트코인ETF, 이더리움ETF 신청 서류만 해도 20건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도 암호화폐를 투자 대상으로 검토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사들이 경쟁적으로 암호화폐 시장에 뛰어드는 것과 달리 국내 금융사들은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KB국민·신한·NH농협·우리은행 등이 지분 투자 또는 합작 회사 설립 등의 방식으로 암호화폐 커스터디 사업에 진출했다. 하지만 은행이 주도적으로 사업을 운영하는 미국과는 출발부터가 다르다. 은행들의 암호화폐 사업 진출을 금지한 법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국내 금융사들은 금융당국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실제 금융위원회는 지난 2017년 금융사의 암호화폐 투자를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는데 아직까지 이런 기조가 이어지고 있다.
국내 주요 증권사들은 가상자산 관련 내부 전담 조직을 꾸리고 관련 리포트를 내는 등 업계 동향을 지속적으로 살피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내부 검토 수준에 머물고 있다. 섣불리 사업 진출을 선언했다가 당국의 타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증권사의 한 관계자는 “당국의 암호화폐에 대한 부정적 기조가 바뀌길 기대하며 물밑에서 사업 진출을 다각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금융사들의 미래 먹거리가 디지털 가상자산시장에서 나올 가능성이 높은만큼 금융당국도 암호화폐 투자에 대해 전향적인 자세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암호화폐를 비롯한 가상자산투자는 전세계 단위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국내에서 규제한다고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미국 SEC에서 비트코인 ETF를 승인하면 내국인도 미국 주식 시장에서 얼마든지 비트코인 ETF를 거래할 수 있는 세상이다. 국내 금융사들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ETF 상품을 해외 금융사들이 독점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국내 기업의 경쟁력을 저해할 수 있는 규제 일변도 기조에서 벗어나 관련 산업이 발전할 수 있도록 당국의 스탠스가 바뀌어야 하는 이유다.
김효섭 하나금융연구소 연구원은 최근 낸 보고서에서 “미국은 가상자산 사업 활성화를 위해 진입규제 확립 등 제도권 편입 논의를 가속화하고 있다”며 “국내 가상자산 투자자가 4대 거래소 기준으로 약 600만 명에 육박하는 가운데 국내 가상자산 제도화 추진이 선진국에 비해 지지부진하다는 의견도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미국 등 선진국의 가상자산 사업에 대한 규제 논의를 바탕으로 국내도 은행 등 금융사가 가상자산 사업을 본격화할 수 있도록 단계적 제도화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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