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HD급 해상도를 자랑하는 영화 163편을 단 1초 만에 처리할 수 있는 초고사양의 D램이 한국에서 개발됐다. 자타공인 업계 최고 사양 D램으로 알려진 ‘HBM3’를 선보인 곳은 다름아닌 SK하이닉스(000660). 이 회사가 보급형 D램에 비해 원하는 고객사가 아직은 적은 편인 초고사양 D램 개발에 1년여를 매달린 이유는 무엇일까?
반도체 업계는 그 해답을 프리미엄 D램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행보로 해석한다. 지난 20일 SK하이닉스가 개발 성공 소식을 알린 HBM3의 사양은 다음과 같다. 초당 819기가바이트(GB)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다. 이는 FHD(풀HD)급 영화(5GB) 163편 분량의 데이터를 1초 만에 처리할 수 있는 빠르기다. 이전 세대인 HBM2E와 비교하면 속도가 약 78% 향상됐다. 또한 오류 정정 코드가 내장돼 있어 D램 셀에 전달된 데이터의 오류를 스스로 보정할 수 있는 기능도 갖췄다.
HBM3는 일반적인 데이터 센터에서 사용하기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초고사양을 자랑하는 D램이다. 수요처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AI) 머신러닝을 기반으로 연구를 진행하는 곳, 시시각각 변화는 기후변화 데이터를 빠르게 해석하거나 신약개발을 위해 기존 연구를 검토하는 슈퍼컴퓨터 등이 대표적으로 꼽히는 수요처다. 성공적인 업무수행을 위해서 HBM3가 필수 불가결인 곳들이다. 그리고 4차산업혁명의 속도가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HBM3와 같은 프리미엄 D램을 원하는 곳은 늘어날 것이다. 제조사인 SK하이닉스 입장에서는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신(新)시장인 것이다.
HBM3는 SK하이닉스가 노하우를 쌓아온 특수한 후공정을 활용해 제품의 가치를 끌어올렸다. 현재 생산하고 있는 D램 메모리를 엮어 훨씬 더 빠른 D램을 만드는 것이 노하우인데, 제조 공정에 투입되는 비용이나 노력이 ‘완전히’ 새로운 칩을 만들어 내는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적게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가격은 비싼 편이라 고부가가치 제품이라 할 수 있다. 통상 일반적인 D램은 개별 칩으로 잘라낸 후 서로 이어 붙이고 리드 프레임을 더하는 패키징 정도만 거치지만, HBM3는 웨이퍼 단계에서 수천 개의 미세 구멍을 뚫어 상층과 하층 칩에 난 구멍을 수직으로 관통하는 전극으로 연결하는 TSV 기술로 패키징을 마무리 한다. SK하이닉스는16GB와 24GB 두 가지 용량으로 출시되는 HBM3는 업계 최대 용량인 24GB를 구현하기 위해 이 TSV 기술을 고도화했다. 엔지니어들은 단품 D램 칩을 A4 용지 한 장 두께의 3분의 1인 약 30마이크로미터(㎛) 높이로 갈아낸 후 이 칩 12개를 TSV 기술로 수직 연결하는 방식을 활용했다.
업계 관계자는 이에 대해 “수익성이 뛰어난 프리미엄 D램인 HBM을 SK하이닉스가 선제적으로 공략하고, 앞으로 확장될 시장 수요를 미리 확보하려는 것으로 보인다”며 연이어 HBM 세대 교체를 주도하는 SK하이닉스의 전략을 설명했다. 앞서 SK하이닉스는 2013년 1세대에 해당하는 최초의 HBM을 개발한 데 이어 지난해 7월 업계 최초로 3세대인 HBM2E를 양산했다. 그 다음 세대인 HBM3는 1년 3개월 만에 개발에 성공했다. 신제품 양산은 빠르면 내년 2분기 전후로 알려졌다. 차선용 SK하이닉스 부사장(D램개발담당)은 “세계 최초로 HBM D램을 출시한 당사는 HBM2E 시장을 선도한 데 이어 업계 최초로 HBM3 개발에 성공했다”며 “앞으로도 프리미엄 메모리 시장의 리더십을 공고히 하는 한편 ESG 경영에 부합하는 제품을 공급해 고객 가치를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HBM의 세대별 성능 표준은 국제반도체표준협의기구(JEDEC)가 제정한다. 4세대 제품은 이전 세대인 HBM2E에 비해 데이터 처리 속도는 약 78% 빠르고 동작전압은 약 8.4% 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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