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兆) 단위로 뿌려지는 중국 정부의 막대한 보조금은 제조업을 떠받치는 강력한 힘이다. 중국 기업들은 이 자본을 기반으로 과감한 공장 증설과 해외 전문 인력 스카우트에 나선다. 반면 한국 기업은 기댈 언덕이 없다. 통상 분쟁에 대한 우려, 대기업에 우호적이지 않은 여론은 한국 정부가 망설이는 요인으로 꼽힌다. 그 결과 디스플레이 같은 주력 산업은 물론 태양광발전·전기버스까지 제조업 각 분야에서 ‘안방’ 시장을 중국에 내주고 있다.
22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중국 디스플레이 업체 BOE와 CSOT는 내년 상반기 출시 예정인 갤럭시A37용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패널 개발에 착수했다. 아직 최종 납품 업체로 낙점된 것은 아니지만 삼성디스플레이가 지난해까지 전량 공급했던 삼성 스마트폰 OLED 패널을 중국 업체가 공급할 수 있다는 소식만으로도 업계에 미친 충격은 컸다. 게다가 이들의 납품이 고려되는 제품은 삼성전자의 중가 스마트폰 가운데 상위 라인업에 속하는 A37이기에 그간 “OLED는 우리가 최고”라고 자평해왔던 한국 디스플레이 업계는 서둘러 원인 분석에 나섰다. 전문가들은 최근 중국 디스플레이 산업의 역량이 한국을 넘볼 정도로 급성장했으며 그 근간에는 10년 넘게 이어진 정부 차원의 강력한 지원이 있다고 설명한다. 박소희 산업연구원 동북아산업실 연구원은 “지난 2010년 이후 중국 정부가 조 단위 자금을 디스플레이 산업에 투자하고 중국 내 TV·휴대폰 등 디스플레이 단말기 산업이 발전하면서 중국 기업의 디스플레이 패널 생산능력이 크게 확대됐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중국 정부는 디스플레이 산업을 키우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보조금을 기업에 제공하고 있다. DB금융투자 분석에 따르면 중국 제1의 디스플레이 기업인 BOE가 2010년부터 10년간 중국 정부로부터 받은 보조금은 2조 원을 훌쩍 넘는다. 이는 같은 기간 BOE가 올린 누적 순이익의 59%에 달한다. 보조금은 기업대출 형태로도 지원된다. 중국 정부는 생산라인 신설·증설 때 투자액 상당 부분을 기업을 대신해 부담한다. BOE는 첫 번째 10.5세대 액정표시장치(LCD) 생산 라인인 허페이 B9을 지을 때 총 투자비 460억 위안(약 7조 8,000억 원) 가운데 6.5%에 불과한 30억 위안(약 5,100억 원)만 자체 조달했다. 허페이시 산하 공기원과 공공투자펀드가 270억 위안을 투자했고 나머지는 정부가 보증을 서고 대출로 충당했다. CSOT가 투자한 플렉시블 OLED 생산 라인(우한 T4)도 유사하다. 총투자비는 315억 위안 수준이지만 CSOT가 자체적으로 투자한 금액은 92억 위안에 그쳤다. 나머지는 우한 지방정부와 은행·투자펀드 자본으로 해결했다. 반면 한국 기업은 이 같은 직접적 지원은 꿈꾸기 어렵다. 오로지 OLED에 투자한 연구개발(R&D)비의 25~30%, 시설 투자의 5~10%에 대한 세액공제만 허락된다.
중국 정부가 뿌리는 산업 보조금은 태양광발전 사업에서도 시장을 교란하는 요인이다. 물론 중국 정부는 올 8월을 기점으로 태양광발전 모듈 부품 등 태양광발전 사업에 지원해온 정부 보조금을 중단했지만 전 세계 태양광발전 사업의 대부분을 장악한 후 내린 결정이다. 한국에너지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국내에 설치된 태양광 패널(모듈) 가운데 중국산 비율은 32.6%로, 2015년에는 22.3%에 불과했지만 빠르게 점유율을 높이는 데 성공했다. 태양광 업계 관계자는 “가격으로는 도저히 중국산과 승부를 볼 수 없다”고 말했다.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는 저가·물량 공세를 펼치는 중국산 전기버스가 점유율을 확대하고 있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KAMA)에 따르면 올 상반기 판매된 전기버스 중 중국산 비중은 40.8%에 달한다. 2019년 26.1%에 이어 지난해 34.0%를 기록한 후 꾸준히 점유율이 올라가고 있다. 전기버스는 자국 정부의 보조금에 힘입은 중국산이 한국산보다 약 1억 원 정도 저렴해 인기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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