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무역’을 기반으로 지난 70년간 글로벌 경제성장을 촉진시켰던 ‘세계무역기구(WTO)’ 시대가 사실상 막을 내렸다. 미국의 조 바이든 행정부가 다자주의로 회귀하며 WTO의 역할이 커질 것이라는 기대는 미중 통상 갈등에 일찌감치 묻혀버렸다. 오히려 중국의 요소 수출 제한과 같은 강대국의 일방통행식 무역 행보는 ‘WTO 무용론’에 힘을 싣는다.
14일 통상 업계에 따르면 전문가들 사이에서 ‘요소수 부족 사태’와 관련해 “WTO 제소 카드를 꺼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정부는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제11조는 특별한 예외가 아니라면 회원국 간 수출입 물량 제한을 금지한다. 이미 제소 사유는 되는 셈이다. 여기다 중국이 자국 내 요소 부족을 이유로 수출 검역을 강화했지만 실제 상황은 달랐다. 이달 초 중국 산업 동향에 따르면 중국 내 요소 재고량은 83만 3,000톤으로 연중 최고치를 기록했다. 중국은 속내를 숨기지도 않았다. 중국 관영 매체 등을 통해 “이번 요소수 공급 위기로 한국·미국 등은 중국이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과 교수는 “중국이 향후 사용할 요소를 보유하고 있고, 수출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보일 경우 충분히 WTO 제소가 가능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우리 통상 당국은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상황이라는 판단이다. 통상 당국 관계자는 “중국이 요소 수출 자체를 금지한 것도 아닌 데다 실익을 검토해봐야 한다”고 밝혔다. 무역 의존도가 높은 우리 입장에서 기댈 수 있는 WTO 체제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정부도 인정한 셈이다. 그렇다고 WTO 체제 자체를 우리가 먼저 포기할 수도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2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공정한 무역 질서 복원’을 강조한 것도 제2·제3의 요소수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글로벌 무역 질서 복원이 필수라는 인식 때문이다. 통상 전문가들은 WTO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고 보다 현실적인 통상 전략을 수립할 것을 주문한다. 우리가 강점인 기술력 등을 내세워 주도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얘기다.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날로 치열해지는 글로벌 기술 경쟁하에서 주도권을 선점하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까지 준비하기 위해서는 기술과 통상의 연계를 강화하고 신시장 확보와 국제 기술 표준 선점 등에 대한 대응 전략 논의를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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