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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무는 자유무역·골디락스 시대…인플레 장기화 공포 커진다

[재편되는 글로벌 공급망]

<하>가치사슬 붕괴는 가격구조 붕괴

각국 주요 원자재 무기화 경향 뚜렷

공급망 교란 심화…물가상승 부추겨

韓 수입물가 상승률 13년來 최고

美 물가도 31년만에 최대폭 상승

OECD "코로나 전보다 고물가 유지"

17일(현지 시간) 영국 런던의 한 주유소에 유종별 판매 가격이 게시돼 있다. 에너지 비용이 상승하면서 지난 10월 영국의 소비자물가는 근 10년 만에 최대 폭의 상승세를 보였다. /연합뉴스




‘골디락스 경제’의 종언인가. 최근 글로벌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면서 안정적 물가 상승 속에서도 높은 경제성장률 달성이 가능했던 이른바 ‘골디락스 경제’의 시대가 끝났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실제 지난 1990년대 ‘세계의 공장’이라 불리는 중국의 경제 개방·개혁이 본격화되면서 한국을 비롯해 미국, 유럽연합(EU) 등은 ‘경제가 성장하면 물가는 오른다’는 경제학 원칙을 무시하며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은 이상적 경제’를 누려왔다.

반면 이번 ‘요소수 대란’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글로벌 무역 분쟁이 일상 재화의 수급 차질로 이어지는 일이 늘고, 각국의 공급망 내재화 기조가 한층 강화됨에 따라 경기 부진 속 물가가 치솟는 현상이 전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각국 중앙은행은 물가를 잡기 위해 기준금리 인상 타이밍을 저울 중이지만 보호무역 기조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경기 침체를 더욱 가속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에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강상모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골디락스 경기는 이제 끝났다고 봐야 한다”며 “미중 무역 분쟁 등으로 자유무역 기조가 급격히 퇴보하고 있어 향후 물가 측면에서 상당한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진단했다.

18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달 수입물가지수는 130.43을 기록해 전년 동기 대비 무려 35.8% 뛰었다. 지난달 상승률은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8년 10월의 47.1% 이후 1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이와 관련해 “최근 원자재 공급 차질은 과거에는 본 적 없는 공급 병목”이라며 “예상보다 높은 소비자물가상승률이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또한 9월 ‘중간 경제전망’을 통해 글로벌 물가 상승 추이가 보다 가팔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OECD는 주요 20개국(G20)의 올해 물가상승률을 5월 3.5%로 전망했지만 9월 전망 당시에는 이를 3.7%로 높였다. 내년 물가상승률 또한 5월 3.4%에서 9월 3.9%로 5개월 새 상승률을 높게 전망하는 등 물가 상승이 한층 가팔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OECD는 우리나라의 올해와 내년 물가상승률 전망치 또한 각각 2.2%와 1.8%로 5월 전망 당시보다 각각 0.4%포인트씩 높였다. OECD 측은 “물가 상방 압력은 코로나19 이전보다 높은 수준이 유지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미국 또한 마찬가지다. 미국의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동월 대비 6.2% 상승해 31년 만의 최고 상승률을 기록했다. 미국은 2018년부터 중국산 제품에 10∼25%가량의 관세를 부과 중이며 이와 관련한 물가 상승 효과가 최근 들어 현실화 되고 있는 모습이다.



글로벌 자유무역 위축은 여러 부문에서 비용 상승을 낳는다는 점에서 이 같은 물가 상승은 필연적이다. 반도체만 놓고 봐도 미국이 TSMC·삼성전자 등에 인건비 등이 높은 미국 내 신규 공장 건설을 압박하면서 향후 D램과 같은 메모리 반도체나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와 같은 시스템 반도체 비용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최근 요소수 파동으로 정부가 요소를 비롯해 중국 의존도가 높은 물자의 수입선을 다각화하기로 하면서 향후 가파른 물가 상승이 불가피하다. 한국은 요소 외에 마그네슘 등 주요 제품 수급을 저렴한 중국에서 조달했지만 관련 제품 다각화는 공급망 안정성 제고 효과에도 불구하고 높은 비용 수반으로 이어진다. 일각에서 주장하듯 정부가 채산성 문제에도 불구하고 주요 기업과 협력해 수입 의존도가 높은 일부 품목을 국내에서 생산할 경우 관련 품목의 가격은 더욱 오를 수밖에 없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번 요소수 공급망 교란으로 값싼 원자재 위주의 수출 포트폴리오를 보유한 국가들은 자신들이 글로벌 무역시장에서 ‘을’이 아닌 ‘갑’이 될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각국이 주요 원자재를 무기화할 경우 글로벌 공급망 교란은 더욱 심해지고 물가 상승률 추이 또한 보다 가팔라질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이달 말부터 닷새간 개최되는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를 통해 세계 무역질서 회복을 기대하고 있지만 무려 4년 만에 열리는 이번 각료회의 또한 무력해진 WTO의 실체를 확인하는 자리만 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미국은 WTO가 각종 보조금과 무역 보복 등으로 글로벌 무역질서를 어지럽히는 중국을 더욱 강하게 제재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중국은 미국의 다자 압박을 피하기 위해 되레 WTO 체제를 옹호하고 있다.

강 교수는 “최근 자국의 물자가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다른 나라에 이를 수출금지 하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국가가 늘어나면서 서로 다시 보복하는 사례 또한 늘어나고 있다”며 “결국 이 같은 수출입 제한이 반복될수록 물가는 계속 오를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밝혔다.

다만 보호무역주의가 물가 상승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효과를 산출해내기에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성윤모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최근 글로벌 물가 상승은 코로나19에 따른 공급망 차질과 미중 무역 분쟁이라는 두 가지 요소 때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며 “이들 요소가 어느 정도 잠잠해진 후 관련 영향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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