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 저도 싫증이 날 때쯤 나는 ‘시간 길어 올리기’를 시작했다. 큰 가오리연 줄처럼 두레박줄을 길고 길게 엮어 시간의 우물, 저 밑바닥까지 늘어뜨려 옛날을 길어 올렸다. 신났고, 아프지만 팔딱팔딱했고, 기쁜 나의, 슬픈 우리 젊은 날의 시간들이 두레박을 타고 올라왔다.”
기자 출신의 경영인이었던 저자가 일상의 장면에서 느낀 삶의 단상들을 산문집으로 풀어 엮었다. 이를테면 역대급 장마가 내리던 어느 여름날은 한국전쟁으로 처참했던 ‘그해 여름’과 겹쳤고 윤흥길의 소설 ‘장마’와 조성진이 치는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을 가로지르다 ‘시간 길어 올리기’에 이르렀고 이왈종의 그림을 떠올리게 하는 식이다. 경험과 취향이 풍성한 저자에게 ‘시간을 길어 올린다’는 것은 “가 본 곳, 만난 사람, 들은 것, 맛본 것, 부딪치고 느끼고, 읽은 것”을 글로 옮기는 일이며, 겸양하게도 자신의 글쓰기를 “얼기설기 꿰는” 일이라 했지만 촘촘한 글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부드럽다.
2006년 도하 아시안 게임 때 음주가 금지된 이슬람 국가에서 ‘일용할 알코올’을 공수하는 장면은 문화적 차이에 대한 통찰을 긴박하면서도 유쾌하게 펼쳐놓는다. 서양화가 변종하에게 직접 받은 박두진의 시집은 성북동 한국가구박물관부터 덕수궁에서 열린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까지 누비며 이상·변동림·김환기의 사연과 이태준·김용준의 우정을 어루만진다. 2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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