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학과 기업의 산학 협력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서울대 평창캠퍼스를 찾았다. 동북아 그린바이오 허브를 표방하는 이곳은 서울에서 승용차로 2시간~2시간 반 걸리는 강원도 평창에 있다. KTX를 타면 청량리역에서 1시간 5분, 서울역에서 1시간 30분이면 닿는 평창역에서 1㎞가량 떨어져 있다. 이곳에 도착하니 학교 주변 산의 능선에 눈이 쌓인 풍경이 마치 알프스의 설산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지난 2014년 준공한 평창캠퍼스는 그린바이오 연구개발(R&D)과 산학 클러스터를 지향하며 출발했다. 그린바이오는 농업과 동식물을 활용해 건강기능식품·화장품·의약품 등을 다양하게 개발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당초 농식품과 농생명 기반의 R&D와 산학 협력을 위한 웰니스·푸드테크 산업의 전진기지를 꿈꾼 것이다.
하지만 캠퍼스를 둘러보니 서울 여의도 면적에 육박할 정도로 공간이 넓은데 활동하는 사람은 교직원과 학생, 입주사 임직원을 합쳐도 390여명밖에 되지 않았다. 아직 산학 협력 생태계가 조성되지 못한 것이다. 이곳을 만들기 위해 3,100억 원 이상 투입됐고 매년 126억 원가량의 운영비가 드는 점을 감안하면 아쉬운 대목이다. 관악캠퍼스에 교수·연구원·학생 등 3만여 명이 있는 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다. 평창캠퍼스 산학 협력 단지에 입주한 기업들도 10여 개에 불과했다. 그나마 서울대 두유 브래드인 ‘약콩두유’를 현지에서 생산하는 대학두유를 제외하면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카길애그리퓨리나 연구소가 눈에 띄는 정도였다.
◇그린바이오 허브 현실은 딴판…교수·학생 부족에 기업 입주 부진
서울대가 그린바이오과학기술연구원·국제농업기술대학원·종자생명과학연구소·식품산업화연구소 등 평창캠퍼스에 좋은 연구 시설을 갖추고도 산학 협력 활성화를 끌어내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우선 수도권에서 떨어져 있어 교수진을 제대로 갖추거나 학생 모집이 쉽지 않은 점을 들 수 있다. 평창캠퍼스는 조교수를 포함한 전임 교수가 25명(신규 채용 예정 2명 포함)에 불과하다. 학생의 경우 국제농업기술대학원에 석·박사 과정이 있는데 외국인까지 포함해 연 40명가량 입학하는 데 그친다. 당초 석사 과정 정원 60명, 정원 외 외국인 학생 40명을 목표로 설정한 데 비하면 부진한 실적이다. 학교 측은 학교 내 구성원과 기업, 지역사회를 위해 본관에 ‘제다움’이라는 라운지도 조성하는 등 나름 노력했으나 뚜렷한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기업 입장에서 보면 인력 관리의 어려움도 만만치 않고 물류 비용도 적지 않다. 게다가 입주 심사는 평창캠퍼스에서 하고 계약은 본부가 맡으면서 초래된 늑장 행정도 기업들의 입주 부진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 주류 관련 벤처기업인은 “공동 R&D를 위해 학교로 제1공장을 이전하려 했지만 학교 측과 6개월가량 협의했는데도 입주 승인이 나지 않아 포기했다”며 “앞으로 여건이 맞으면 연구소를 설립한 뒤 제2공장을 추진하려 한다”고 털어놓았다. 대학에 입주할 경우 부동산 상승 이익을 추구할 수 없다는 단점을 감수하고서라도 입주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국내 대학의 뿌리 깊은 논문 중시 풍토로 외부의 좋은 인재를 정교수로 채용하지 못하는 현실도 산학 협력 활성화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야쿠르트 중앙연구소장 출신인 허철성 평창캠퍼스 국제농업기술대학원 교수는 “저는 다행히 기업 연구소 팀장 시절에 건강음료를 개발하면서 서울대 의대 교수와 함께 논문을 썼다”며 “다른 논문들도 써놓은 게 있어 50세를 넘겨 정교수로 임용됐다”고 말했다. 그는 “다른 전문가들은 기업 R&D 분야 등에서 아무리 많은 경험을 했더라도 논문 실적이 없으면 정교수로 임용되지 못한다”며 “이런 문화를 바꿔야 산학 협력을 활성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교수 임용이나 승진·재임용 과정에서 논문 위주로 판단하는 한 영향력 있는 교수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최근 평창캠퍼스 등이 6년 동안 230억 원을 지원하는 농림축산식품부의 그린바이오 벤처 기업 육성 프로젝트에 응모했다가 고배를 마신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허 교수는 “마이크로바이옴 유산균 1㎏의 가치는 140만 원가량인데 이를 의약품으로 만들면 1억 원이 될 정도로 부가가치가 급등한다”며 “산학 협력이 잘되면 헬리코박터균을 억제하고 지방간을 막는 김치를 개발할 수도 있는데 현실은 녹록지 않다”고 설명했다. 평창캠퍼스가 6차 산업 중심으로 농생명밸리로 커나가야 하는데 산학 협력이 활성화되지 못해 안타깝다는 얘기다. 임정빈 평창캠퍼스 그린바이오과학기술연구원 원장은 “그린바이오 산업은 우리 농산물을 활용해 천연물 화장품, 생물 의약품, 친환경 소재를 개발해 고부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며 “지난해 정부에서 그린바이오 농생명산업 육성 전략을 발표했는데 산업화를 위한 응용 연구에 속도를 낼 것”이라고 밝혔다.
◇논문 위주 교원 평가 시스템에 학교 늑장행정이 걸림돌
이런 식이라면 서울대와 강원도, 현지 정치권이 희망하는 대로 평창에 바이오 신도시 조성을 추진하는 것도 요원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 대학과 지방자치단체 측은 정부로부터 6,000억 원가량을 지원받아 인구 3만 명 규모의 평창 바이오신도시를 조성하는 것을 희망한다. 하지만 아직 정부의 예비타당성 검토 리스트에 올라가지 못했다. 실제 셀트리온 등 대기업의 경우 수년째 입주 여부에 대해 연막만 피우고 있다. 평창캠퍼스의 한 교수는 “생명공학과 농업이 융합한 그린바이오는 미래 성장 동력을 키울 수 있는 신산업”이라며 “산간 지방에서 교수·연구원·학생·교직원·가족들이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한다”고 하소연했다.
서울대 본부에서 주요 보직을 맡고 있는 한 교수는 “연구를 잘하는 교수가 좋은 특허도 내고 기술 사업화도 잘할 수 있다”며 “기업 경험이 많은 분들을 산학교수 등으로 모시면 되지 굳이 정교수 트랙으로 모셔야 하느냐”고 말했다. 논문 외에 산학 협력이나 창업 등 평가 지표를 다양화하자는 데 부정적 입장을 피력해 현장과의 온도차를 보여줬다.
이런 분위기로 여전히 ‘논문을 위한 논문’ ‘특허를 위한 특허’라는 구습이 근절되지 않고 있다. 서울대·KAIST·고려대 등 주요 대학에서 창업한 교수와 학생이 늘고 있지만 미국·중국·유럽·이스라엘·싱가포르 등의 글로벌 대학에 비하면 기업가 정신이 한참 부족하다는 얘기다. 그 결과 국내 대학들은 기업들에 기술을 이전해 2019년 총 1,019억 원의 수입을 올리는 데 그쳤고 그 중 절반가량을 연구자에게 성과급으로 지급했다. 여기에 국내외 특허 출원·유지비로 668억 원을 썼다. 대학들이 정부와 공공기관·기업에서 R&D 과제를 수주해 논문을 쓰고 특허를 냈지만 기술이전 수입만 놓고 보면 오히려 마이너스인 셈이다. 정부가 내년에 대학, 정부 출연 연구기관, 기업에 지원하는 R&D 자금은 30조 원에 달한다.
김정호 KAIST 전기·전자공학부 교수(KAIST·삼성전자 산학협력센터장)는 “기업에 대한 기술이전이나 창업이 잘되지 않는 것은 승진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이어 “대학에서 받아들인다면 테뉴어(65세 정년 보장 교수)를 반납하고 계약직으로 전환할 용의가 있다”고 토로했다. 대학의 철밥통 문화를 혁신해 매년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은 교수는 외려 70~80세까지도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TLO·대학 기술 사업화 강화…산학 교육 확대 필요
대학의 기술이전조직(TLO)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문도 많다. 이광형 KAIST 총장은 “하버드대도 이제는 공대를 키우고 학교 주변에 500여 개 기업이 생기게 하는 등 밸리 조성에 발 벗고 나서고 있다”며 “TLO에 인센티브가 없어 열심히 하지 않는 현실을 고려해 라이선싱 부서를 민영화하며 건당 20만~30만 원씩을 줘 보험사 직원이 영업하듯이 만들려고 한다”고 밝혔다. 김우승 한양대 총장도 “미국 대학에서 기술이전 등 산학 협력이 잘되는 것은 TLO가 잘돼 있기 때문”이라고 거들었다.
대학 안팎에서는 교수와 연구원 중심으로 기업과의 공동 R&D나 기술이전뿐 아니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산학 교육 확대로 연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용훈 울산과학기술원(UNIST) 총장은 “50년 전 교육의 틀이 유지되고 있는 이공계 학사 교육을 ‘쿵푸형’에서 ‘격투기형’으로 혁신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기초→심화→응용’ 등 단계를 밟아가는 ‘쿵푸형’ 교육에서 벗어나 잽·스텝 등 실전에 필요한 핵심 기본기만 익힌 뒤 곧바로 링에 올라 문제 해결에 도전하는 ‘격투기형’ 교육으로 탈바꿈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 총장은 “미국 등 해외 대학들은 교육 혁신과 산학 벤처밸리 조성에 적극 나서고 있다”며 “공대는 물론 인문·사회 분야에서도 기업이 전공 교과목 가운데 20% 비중의 문제를 내고 평가하는 산업 연계 프로젝트 수업(IC-PBL)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 교수는 “대학원생이 창업에 성공해 사회에 기여하면 석·박사를 줄 수 있다든지 유연성 있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교육과 논문에 치중하는 국내 대학의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는 조언도 많다. 권오경 한국공학한림원 회장은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을 때 지도교수가 실용적 연구를 했다”며 “직접 창업해 지금도 운영하고 있는데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국내 대학이 연구를 위한 연구를 많이 하다가 최근 실용화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한다”며 “학생들도 이런 분위기를 따라갈 것”이라고 기대했다.
평창캠퍼스 현장 방문 일정에 동행한 이기원 서울대 푸드테크학과장은 “대학에서 젊은 박사후연구원이나 조교수가 연구 논문에만 주력한다”며 “막상 테뉴어를 받은 뒤에는 적당히 해도 되는 문화가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오히려 테뉴어가 된 뒤 그동안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기술 사업화에 나서야 한다”며 “다양성과 혁신성을 반영하는 인사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평창=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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