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의 내한 독주회가 한창이던 지난달 22일 저녁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 관객이 ‘피아노의 신’의 연주에 한창 빠져든 그때 객석 2층 맨 끝 열에 숨죽인 채 무대를 주시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연주자의 미세한 표정 변화부터 정적을 깨는 격정적인 움직임까지 무대 위 모든 순간에 집중하는 그의 손엔 검은색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주변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그러나 예리하게 찰나를 포착하던 남자는 이날 공연에서 촬영을 허락받은 유일한 사람, 사진 작가 심규태다. 인물 사진을 전문으로 해 온 심 작가는 10년 전부터 클래식 음악가의 색다른 프로필이나 현장감 넘치는 공연 사진으로도 활발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롯데콘서트홀의 전속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22일 공연 직전 서울경제와 만나 “회차가 많지 않은 클래식 공연은 그 순간이 지나가면 정말 끝”이라며 “역사에 남겨야 하는 장면이라는 마음으로 애써서 촬영하고 있다”고 웃어 보였다.
이날 그의 주된 작업 공간은 롯데콘서트홀 객석 2층 맨 뒤 음향실과 조명실 사이의 공간. 성인 한 명 앉으면 꽉 차는 이 좁고 컴컴한 곳에서 생동하는 현장이 기록된다. 그는 “고요한 독주회의 경우 카메라에 방음 덮개를 씌운다 해도 관객들이 예민해 사진 찍는 게 참 힘들다”며 “거의 부동 자세로 숨까지 참아가며 셔텨를 누르기에 그 좋은 음악도 귀에 들어올 틈이 없다”고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소리가 나지 않더라도 ‘비판매 좌석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신경 쓰는 관객도 있기 때문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약속된 포즈가 존재하는 촬영이 아니기에 베스트 컷 얻기는 더더욱 어렵다. “연주자들이 사진을 신경 쓰며 연주하지는 않기에 NG 컷이 많이 나오는 게 공연 촬영이죠. 여럿이 함께하는 공연은 커튼콜 때 한 사람만 눈을 감아도 못쓰게 되고요.” 현장 경험이 쌓이면서 연주의 흐름 상 동작이 커지는 시점을 파악해 가능한 한 동적인 장면을 포착하는 ‘기술’이 붙었지만, 그는 “여전히 쉽지 않다”고 혀를 찼다. 참고로 이날 심 작가가 숨죽이며 담아낸 감동의 현장은 모두 키신 본인의 확인을 거친 뒤 공개됐다.
연주자의 프로필 촬영이라고 수월한 것도 아니다. 연예인이나 전문 모델과의 작업도 펼쳐 온 심 작가는 “클래식 아티스트들은 카메라 앞에서 어색해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그래서 미리 그 사람의 (이미 공개된) 다른 사진이나 기사를 찾아보면서 외모나 성향, 특징을 파악해 두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클래식 연주자 사진 하면 떠올릴법한 뻔한 구도는 지양하는 편이다. 예컨대 지난해 5월 촬영한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 사진은 그동안 클래식 연주자 프로필에서는 볼 수 없었던 패션 화보 느낌으로 업계에 심 작가의 이름을 더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는 “굳이 사진에서까지 교과서처럼 연주자임을 강조하며 똑같이 찍을 필요가 있나 싶었다”며 “이 사진이 공개되고 많은 데서 연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6월 김봄소리가 도이치그라모폰을 통해 발매한 솔로 데뷔 앨범의 커버를 담당했는데, 왼손을 내어 보이며 바이올린을 품에 안은 모습은 당당하고 고혹적인 연주자와 악기의 매력을 한껏 살려 눈길을 끌었다. 김봄소리가 ‘작가님이 다 알아서’ 쪽이라면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주는 작가와 미리 많은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건네는 편이다. 심 작가는 “작가에게 여러 콘셉트를 많이 던져주기 때문에 서로 고민하면서 완성도가 높아지더라”며 “아티스트 개개인의 성향을 파악하고, 촬영 현장에서 서로가 당황하지 않게 하는 것이 내가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사진도 연주자의 또 다른 옷이자 표현입니다. 저는 연주자를 더 멋지게 보여줄 수 있는, 그들이 더 돋보이는 순간을 남기고 싶어요.” 공연장의 감동부터 연주자의 개성까지, 우리가 만나는 ‘음악의 완성’엔 객석의 어둠 또는 수많은 고민 속에 셔터를 누르는 누군가도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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