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 나선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작심한 듯 기획재정부를 상대로 날 선 비판을 쏟아냈다. 윤 원내대표는 “올해 초과 세수가 50조 원이 넘는데 이를 세입 예산에 잡지 못한 것은 재정 당국의 심각한 직무 유기”라면서 “의도가 있다면 국정조사라도 해야 한다”고 기재부를 공개 압박했다. 여당이 국정 파트너인 정부 부처를 상대로 국정조사까지 거론한 것은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기재부는 발칵 뒤집어졌다. 수십조 원에 이르는 세입 추계 오차를 낸 점에 대해서는 과오를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 세수 전망을 보수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측면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의도적으로 세입을 축소한 것 아니냐는 의혹 제기에 대해서는 “해도 해도 너무한 것 아니냐”는 격앙된 반응까지 나왔다.
기재부는 결국 공식 보도자료를 내고 “세수 예측을 정확히 하지 못해 송구하다”면서도 “추가 세수 전망치는 11월 중순께 대통령께 보고했고 11월 15일 여당에도 설명했다”고 반박했다. 경제 부처의 한 고위 관계자는 “대선을 앞두고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고공 행진을 이어가고 있으니 차마 청와대를 직접 때리지는 못하고 만만한 기재부를 공격하는 것 아니겠느냐”며 “후배들에게 동네북으로 전락한 조직에 충성을 요구하기도 민망한 노릇”이라고 토로했다.
경제 부처 과장급 이상 관료 10명 중 7명이 “민간 이직을 고민한 적이 있다”고 답할 정도로 집단 무기력증에 빠진 요인은 다층적이다. 과거 국가 경제를 좌지우지하던 영광은 온데간데없이 조직의 위상 자체가 추락했고 정책 결정의 자율성도 크게 제한돼 자부심을 갖기도 어려워졌다. 여기에 과거 관료 집단과는 인종(人種)부터가 다른 것 같다는 일명 ‘MZ세대’ 사무관의 비중이 크게 확대되면서 이전 세대가 누렸던 자긍심과 현재 세대가 갖고 있는 냉정한 현실감각 그 어느 쪽에도 발을 딛지 못한 채 방황하는 중고참급 관료들이 크게 늘었다.
실제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경제 부처는 ‘기획 조직’에서 ‘집행 조직’으로 위상이 격하됐다. 문재인 정부가 정권 초기부터 밀어붙인 ‘주택담보인정비율(LTV) 규제 강화’와 ‘탈(脫)원전’ 등이 대표적 사례다. 당시 주무 부처인 금융위원회와 산업통상자원부 내부에서는 각각 “금융의 기본 원칙을 어기고 대출 규제를 집값 잡는 수단으로 써서는 안 된다” “무리한 탈원전은 부작용이 더 크다”는 실무자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모두 청와대의 압박 아래 힘을 잃었다.
특히 산업부에서 원전 업무를 담당하다 감사원 감사를 방해했다는 혐의로 3명의 공무원이 올해 초 재판에 넘겨지는 일까지 벌어지면서 경제 관료들 사이에서는 상관이 업무를 지시할 때 메모나 녹취록을 남기는 것이 거의 상식으로 통하고 있다. 경제 부처의 한 과장급 관료는 “상부에서 오더가 내려오면 시끄럽게 만들지 말고 원하는 방향 내에서 조용히 일이나 하자는 게 대체적인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임용 과정에서부터 주류 경제학에 익숙한 경제 부처 관료들에게 ‘소득 주도 성장’과 같은 비주류 경제학을 강제 주입한 것도 공무원들의 무기력증을 이끈 요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문재인 정부 출범 전부터 “소득 주도 성장은 마차가 말을 끌게 하는 격”이라는 비판이 거셌지만 홍장표 전 청와대 경제수석 등 이른바 ‘어공(어쩌다 공무원)’들이 정책을 밀어붙여 결국 고용시장 불균형 확대 등 부작용만 더 키웠다는 게 경제학계의 분석이다.
문제는 앞으로 비주류를 넘어 상식의 틀까지 깨는 경제학 이론을 앞세운 학자들이 청와대를 점령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경제 책사이자 차기 정부 초대 경제부총리 후보로 거론되는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가 대표적 인사다. 그는 지난해 한 간담회에서 “한국은행이 돈을 마구 찍어서 물가가 100배 상승했다고 하면 돈 100억 원 가진 사람은 돈의 실질 가치가 1억 원으로 줄지만 돈이 없는 사람은 피해가 없다”며 “한은이 물가 안정만 신경 쓰지 말고 돈 없는 사람이 돈을 확보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한은이 지폐를 마구 찍어낼수록 우리 경제가 건전해진다는 의미다. 이 후보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나랏빚은 곧 민간의 자산”이라거나 “가난한 사람이 고금리 대출을 받는 것은 불공정”이라는 식의 기존 경제학 원론을 부정하는 발언을 연일 쏟아내고 있다.
경제 부처의 한 국장급 관계자는 “경제정책은 치밀한 분석과 예측을 통해 시행돼야 하는데 ‘선출된 권력’의 명령에 복종하라는 식으로 나오면 정부 부처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라며 “이런 기조가 장기화하면 정책의 품질이 떨어지고 그 피해는 결국 국민들이 뒤집어쓸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