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동설한에 백화(百花)가 만발했다. 색색의 채송화가 피었고 연산홍 주위에는 나비가 날아든다. 돌봄의 손길 없이 길가에서도 홀로 살아 견디는 분꽃은 한밤중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서도 명랑하다. 일본 여행 때 만난 라벤더 군락도,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 새벽에 본 코스모스 무더기도 모조리 그림에 담았다. 아니, 그림 속에 심었다. ‘꽃의 화가’라 불리는 원로작가 노숙자(78)의 작품들이다. 대(代)를 이어 그림 그리는 딸 이정은(50)과의 2인전 ‘가까이 오래’가 이달 말까지 종로구 송현동 이화익갤러리에서 열린다.
노 화백은 실제로 본 꽃만 그린다. 실경과 사생은 원칙이며 철학인지라 때로는 흙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쉽게 볼 수 없는 야생화는 구해다 심기도 하고, 정원에 꽃씨를 뿌려 키워가며 그렸다. 생명력 있는 개체로서 꽃이 갖는 고유한 개성과 정체성이 중요했다.
섬세한 필치의 이정은 작가도 꽃 작업으로 유명하다. 그의 꽃은 늘 화병에 꽂혀 있다는 게 다른점이다. 밖에 핀 꽃은 풍경화요, 안으로 갖고 들어온 꽃은 정물화가 된다. 한국의 전통 정물화라 할 수 있는 책가도 형식에 화병(花甁)을 얹은 그의 작품들은 일상 속 소소한 풍경을 펼쳐보인다. 신작 ‘CEO의 서가’는 싱가포르의 경영대 도서관에서 촬영한 책 사진을 기반으로 한 경영인의 서가를 상상해 그린 작품이다. 책들 사이에는 정직과 신뢰를 되새기게 하는 피노키오, 지혜의 상징 부엉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까치와 사업번창을 은유하는 포도·석류 등을 배치했다. 러시아 마트료시카, 비트라 목각인형, 마블의 히어로 미니어처 등으로 성공한 CEO의 취향을 더했다. 그림 속 길상(吉祥)으로 복을 비는 전통과 현대미술로서의 재해석이 적절한 조화를 이룬다.
전시장에서 만난 이 작가는 “엄마에게 그림을 배운 기억이 없는데도 긴 세월 곁에서 보아온 엄마의 영향이 나타났다. 그림의 소재를 가까이서 찾아내는 것, 오래 보고 천천히 그리는 화가의 태도가 똑같다”면서 “식물과 교감하며 자연에서 위로받던 엄마의 시간과 사물에 담긴 기억과 뜻을 되새긴 나의 시간을 들여다보니 우리는 다르면서도 꽤 닮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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