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30일 결국 원자력발전을 제외한 ‘한국형 녹색분류체계(K택소노미)’ 발표를 강행하면서 원전 업계를 포함한 국내 산업계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차기 정부에서 재개정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K택소노미 발표를 밀어붙인 것을 두고 일각에서는 ‘시한부’ K택소노미라는 지적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대선 뒤 차기 정부가 공식 출범하는 내년 5월 이후 K택소노미가 재개정 논의 테이블에 오를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실제로 환경부 관계자는 “택소노미는 고정된 것이 아닌 만큼 향후 상황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며 “유럽연합(EU)에서 택소노미에 원전을 포함한다는 결정을 내리면 정부도 논의를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환경부는 이번에 발표한 K택소노미를 1년간 시범 운영한 후 개정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전문가들은 대선 결과에 따라 개정 시점이 더 빨라질 수도 있다고 관측했다.
이 같은 관측이 나오는 가장 큰 이유는 현재 적신호가 켜진 체코·폴란드 원전 수주 사업 때문이다. 통상 원전 수출을 진행할 때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자본을 유치해야 한다. 한국수력원자력이 아랍에미리트(UAE)에 원전을 수출할 때도 UAE에서 70%, 국내에서 30%의 자금을 각각 조달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수원 관계자는 “원전 수출을 담당하는 실무 부서 입장에서는 침울할 수밖에 없다”며 “원전의 해외 수출을 추진하면서도 각종 혜택이 많은 택소노미에서 원자력발전이 빠진다면 어떡하라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이어 “다만 환경부가 EU 택소노미 결정 과정을 보고 재논의한다고 밝힌 만큼 이에 기대를 걸고 있다”고 덧붙였다.
EU는 지난 22일 택소노미에 원전을 포함해 발표할 예정이었지만 회원국 간 의견 충돌이 이어지면서 발표를 내년 초로 미뤘다. 프랑스를 비롯해 헝가리·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등이 원전에 찬성했지만 독일·오스트리아·포르투갈·덴마크 등은 원전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EU가 발표할 택소노미에 프랑스가 주장하는 원전과 독일이 주장하는 액화천연가스(LNG) 모두 ‘빅딜’ 형식으로 포함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EU 택소노미에 원전이 포함된다는 것은 프랑스가 체코·폴란드와 함께 원전에 대한 세제 혜택 및 저금리 차관 확보에 성공했다는 의미다. 체코와 폴란드에서도 프랑스 원전을 우선 검토할 수밖에 없고 우리 원전의 해외 진출은 힘들어질 가능성이 크다. 아울러 자금 조달에서도 문제가 생긴다. 수출입은행이 K택소노미에 없는 항목을 지원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정동욱 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는 “정부가 투자를 막은 석탄 분야처럼 원자력 분야에 대한 투자도 막게 되는 것”이라며 “국내에 원전을 더 이상 짓지 않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라고 지적했다.
환경부는 채권·프로젝트파이낸싱 등 사업 단위 금융 상품에 우선 적용해 지침서를 보완하고 2023년부터 녹색분류체계를 녹색채권 가이드라인에 전면 적용할 계획이다. 전 세계적인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열풍 속에 올해 9월까지 국내에서 발행된 녹색채권 규모만 14조 5,000억 원에 달한다. 이는 지난해보다 15배나 늘어난 규모다. 총 650조 원 규모의 연기금을 운용하는 국민연금도 내년부터 K택소노미를 투자 결정에 참조할 예정이다.
이 같은 이유로 전문가들은 내년 새 정부가 들어선 후 K택소노미가 수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에너지정책학과 교수는 “K택소노미는 상황에 맞춰 조정할 수 있다”며 “택소노미의 원조 격인 유럽에서 원전을 포함시킨다면 정부도 상당한 압박을 느낄 것이고 내년에 새 정부가 들어섰을 때 (K택소노미를) 수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역시 “1월 중순 발표할 EU 택소노미에서 원전이 포함된다면 우리 역시 고치지 않을 수 없다”며 “지금 원전을 배제한 채 택소노미를 발표하는 것은 정권 말 대못 박기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한편 K택소노미 초안에서 빠졌던 LNG 발전과 블루수소는 최종안에 한시적으로 허용하는 조건으로 전환 부문에 포함됐다. 구체적으로 온실가스 배출량이 340g CO₂eq/㎾h 이내이고 설계 수명 기간 평균 250g CO₂eq/㎾h 달성을 위한 감축 계획을 제시한 LNG발전을 2030년부터 2035년까지 한시적으로 포함해 저·무탄소 발전 설비로 활용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또 LNG로 생산한 그레이수소보다 온실가스를 60% 이상 감축하는 블루수소 생산을 2030년까지 한시적으로 포함하되 추후 기술 발전에 따라 감축 기준을 상향한다.
일부 환경 단체의 K택소노미에 LNG 발전 등 전환 부문을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환경부 관계자는 “전환 부문은 탄소 중립 기여도가 높은 활동을 엄격하게 선정했다”며 “녹색분류체계에 현재 포함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고 있다”고 밝혔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