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기 한국 화단에 김환기·유영국과 ‘단색화’만 있었던 게 아니다. 세계 미술계가 한국미술을 주목하기 시작한 가운데 ‘K아트’의 새 얼굴을 고민하던 학고재갤러리가 올해 첫 전시로 ‘에이도스(Eidos)를 찾아서’를 준비한 이유다. 부제는 ‘한국 추상화가 7인’. 미술 전문잡지 ‘아트인컬처’의 대표이기도 한 김복기 경기대 교수가 총괄기획을 맡아 “한국 추상회화의 역사를 되짚어 잊힌 작가를 다시 소환하고 묻힌 작가를 새롭게 발굴하며 올바른 미술사적 위상을 재조명”하고자 했다.
유영국·이중섭과 같은 해에 태어난 이봉상(1916~1970)을 필두로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대통령상 수상작가인 류경채(1920~1995)와 강용운(1921~2006), 이상욱(1923~1988), 천병근 등 1920년대생 작가들, 해방 후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정신세계를 담는 추상화를 추구한 하인두(1930~1989)와 이남규(1931~1993) 등이 그 주인공이다.
일명 ‘단색화’는 자연의 색을 닮은 담담한 색조와 수행에 가까운 반복적 행위라는 공통 분모를 가진다. 작가들은 대체로 김환기의 제자 세대, 1930년대에 태어나 1970년대를 전후해 자신의 ‘시그니처’를 완성하고 이후 수십 년 간 추상의 변주를 보여주는 이들이다. 이번 전시의 주인공들은 그 ‘형님 세대’에 해당한다.
첫 작품이 이봉상의 1963년작 ‘나무Ⅰ’이다. 1970년 신세계갤러리 전시 이후 72년 만에 다시 세상에 나온 그림이다. 작가는 나무·숲·달·산·새 등 자연 소재에 한국 토착설화의 서사성을 녹여 추상화를 이뤘다. 김환기와 마찬가지로 그 시절 작가들은 한국적 소재를 자신만의 화법(畵法)으로 풀어내고자 했다. 후안 미로를 무척 좋아했던 화가 천병근의 1957년작 ‘무제’는 극사실적으로 그린 눈(目)과 상징적으로 표현한 해·별·새 등이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원과 삼각형으로 단순화 한 사람의 신발이 우리네 고무신을 꼭 닮아있다.
류경채는 1960년대에 ‘자연으로의 회귀’를 읊조리며 동양적이고도 서정적인 자신만의 추상을 파고들었다. 전시 아카이브로 공개된 친필 원고에 “언제부터인지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계절’이라는 명제를 서슴치않고 붙이게 됐다”고 적은 작가의 1976년작 ‘화사한 계절’은 전혀 화사하지 않다. 캔버스 위에 흙빛 안료의 흔적이 남았을 뿐이다. 화사한 계절이 이미 지났는지, 곧 다가올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분명 사연이 있을 법한 작품이다. 호남 추상미술의 거장이기도 한 강용운의 ‘예술가’ ‘생명’ 등의 작품도 작가가 품었던 속 깊은 이야기가 형태가 허물어진 추상 속에 녹아들었다.
이상욱의 작품들은 현대적 미감으로 빛난다. 점·면 위주의 기하학적 추상과 띠 같은 붓질의 작품들로 크게 나뉘는데, 작품의 참맛은 전시장의 그림 가까이에서만 느낄 수 있다. 덩그러니 놓인 원, 붓질을 반복한 선들에서 고민과 숙고를 거듭한 작가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 붓질이 마치 달항아리를 어루만지는 손길, 직접 만든 케이크에 생크림을 바르는 정성을 느끼게 한다.
신관 지하2층에 나란히 전시된 하인두와 이남규는 생전에도 절친했다고 한다. 하인두는 선명한 오방색을 활용해 전통 신앙과 불교적 세계관을 담았고, 스테인드글라스를 배운 이남규는 빛의 오묘함과 영롱함을 포착했다.
이들을 관통하는 한국 추상미술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김복기 교수는 “내용주의, 즉 내용이 있는 추상”이라고 답한다. 실재하는 자연에서 얻은 영감을 개성적으로 화면에 실현했다는 뜻이다. 그는 “K아트의 대표로 꼽히는 단색화는 세계에 한국 현대미술의 힘을 보여준 기적이었지만, 단색화가 한국 미술의 전부는 아니다. 우리 미술계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국 추상회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추상이라는 형식에 내용과 정신까지 함께 들춰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전·광주시립미술관 등지의 소장품과 유족이 간직해 온 작품들을 끌어모으는 일이 상업화랑으로서는 녹록치 않았다. '미술관이 기획했어야 할 전시’라는 호평이 잇따르는 이 전시는 2월6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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