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이 암호화폐로 모금한 정치 후원금은 즉시 현금화해 관리해야 한다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유권 해석이 나왔다. 암호화폐는 가격 변동성이 큰 만큼 후원금을 받을 때와 신고 시점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가격 차이를 최소화하라는 취지다. 하지만 암호화폐 거래시장이 24시간 열리는 점을 고려할 때 선관위의 이 같은 방침은 현실과 맞지 않다는 비판이 나온다.
7일 정치권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 이광재 의원은 지난 달 11일 국내 최초로 암호화폐 정치 후원금 모금 사이트 ‘광재의실험실.com’을 열었다. 후원자들은 비트코인(BTC), 이더리움(ETH), 클레이튼(KLAY), 퍼블리시(NEWS), 페이코인(PCI) 등으로 정치 후원금을 낼 수 있다.
하지만 암호화폐는 가격 변동성이 커 시세를 평균화하기가 어렵다. 후원자로부터 100만원어치의 비트코인을 받았더라도 시점에 따라 후원금의 액수가 달라지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이는 선관위에 후원금 액수를 보고할 때도 마찬지로 발생할 수 있다.
이런 문제의 해결 방식을 묻는 이 의원실의 질의에 대해 중앙선관위는 “후원회가 가상자산을 받은 뒤 즉시 현금화해서 후원회 (은행) 계좌에 넣어야 한다”고 답했다. 암호화폐 후원금이 들어올 때마다 암호화폐 거래소에서 매매를 통해 현금화하라는 것이다. 언뜻 보면 명쾌한 답변 같지만, 암호화폐 거래시장이 24시간 열리는 점을 고려하면 현실과 동떨어진 해석이라는 지적이다. 의원실에 암호화폐 전담 트레이더가 24시간 대기하고 있지 않은 이상 수시로 들어오는 암호화폐 후원금을 일일이 현금화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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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의원실이 거래소 지갑이 아닌 별도의 개인지갑으로 암호화폐 후원금을 받을 경우 매매를 위해 거래소 지갑으로 옮기는데도 시간이 소요된다. 중앙선관위의 ‘즉시 현금화하라’라는 지침은 암호화폐 거래와 관련한 기본적인 사실조차도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것이라고 의심할 수 있는 대목이다.
중앙선관위의 이 같은 방침은 한국보다 앞서 암호화폐 정치 후원금 모금을 시작한 미국과도 대조된다. 미국 연방선거관리위원회(FEC, Federal Election Commission)는 “후원금을 받는 시점의 비트코인 시장가치를 기준으로 후원금을 평가하되, 현금화하기 전까지 지갑에 비트코인을 보유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FEC는 후원금으로 받은 비트코인 개수와 현금화하지 않은 비트코인 개수 등을 보고서에 표기하라고 권고했다. 즉 후원금이 입금된 시점의 암호화폐 가치만 명확히 기록해두면, 향후 이를 현금화하는 시점은 의원실 재량에 맡기겠다는 의미다.
FEC는 암호화폐 현금화 과정에서 보고해야 할 사항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의원실이 비트코인을 신원 확인이 가능한 사람에게 판매했다면 해당 판매자가 의원실에 기여했다고 보고 몇 개의 비트코인을 얼마에 팔았는지 영수증을 작성해야 한다. 반면 거래소 등을 통해 신원확인이 불가능한 사람에게 판매했다면 거래소 명칭 및 주소, 매도 시점 및 매도 시 가격 등을 보고해야 한다. 동일 시점일지라도 각 거래소 별 암호화폐 가격이 다르다는 점을 숙지하고 이 같은 규정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광재 의원실은 중앙선관위의 지침을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다른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이광재 의원실 관계자는 “중앙선관위로부터 가능한 빨리 현금화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일주일에 한 번 날짜와 시간을 정해두고 현금화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후원금이 입금된 시점의 암호화폐 가격으로 후원금을 산정하되 현금화 시점에 변동된 금액에 대해선 회계 장부에 명시해 처리하겠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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