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민규(29·의정부시청)는 2018 평창 동계 올림픽 스타 가운데 가장 빨리 잊혀가는 선수 중 한 명이었다. 평창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빙속) 남자 500m에서 깜짝 질주로 은메달을 따냈지만 이후 내리막을 걸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월드컵 시리즈 4개 대회에서 올림픽 메달리스트에 걸맞은 성적을 전혀 내지 못했다. 1차 대회 1차 레이스에서 18위에 그쳐 디비전B(2부 리그)로 내려가는 수모를 겪었다. 총 8차례 레이스 중 1부 리그 톱 10 기록은 2차 대회 1차 레이스의 7위 딱 한 번이었다. 그대로면 생애 두 번째 올림픽은 참가에 의의를 둬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차민규는 지난 12일 중국 베이징 국립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끝난 2022 베이징 동계 올림픽 빙속 남자 500m에서 34초 39의 기록으로 반전의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평창 때 자신의 기록(34초 42)보다 더 빨랐다.
앞서 달린 중국의 가오팅위가 올림픽 신기록(34초 32)을 세우며 압도적인 모습을 보인 까닭에 메달 후보들 대부분은 자기 페이스를 잃고 무리한 레이스를 펼쳤다. 반면 스케이트 날과 마음의 날을 함께 벼리고 이 대회에 나온 차민규는 침착했다. 마지막 조에서 뛴 우승 후보 로랑 뒤브뢰이(캐나다)는 한 차례 부정 출발에 스타트 속도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4위에 그치면서 차민규의 2위 입상이 확정됐다.
가오팅위에게 불과 0.07초 뒤진 채 경기를 마친 차민규는 “뒤늦게 스케이트 날이 제대로 잡혔다”고 돌아봤다. 장비 문제로 제 기량을 펼치지 못하던 그는 월드컵 4차 대회 뒤 수소문 끝에 평창 올림픽 장비 담당이었던 장철 코치를 만났다. 골반 부상과 그에 따른 재활을 이겨낸 차민규는 입맛에 딱 맞게 날을 세운 스케이트를 신고 가장 큰 무대에서 펄펄 날았다.
평창에서 우승자보다 0.01초가 모자랐던 차민규는 이번에도 간발의 차로 금메달은 놓쳤다. “금메달을 따지 못해 아쉽지만 만족한다”고 밝힌 이유다. “평창 올림픽이 끝난 뒤 ‘깜짝 메달’이라는 표현이 나오자 부모님이 섭섭해하셨다. 열심히 노력한 것을 아셨기 때문”이라는 차민규는 “이번 대회를 앞두고도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노력했다. 특히 스타트를 빨리 끊기 위해 노력했는데 생각대로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차민규의 선수 생활은 2014 소치 올림픽을 앞두고 끝날 뻔했다. 발목 인대를 두 군데나 심하게 다쳐 수술 뒤 1주일 만에 재수술까지 받았다. 의사는 “다 나아도 운동 능력이 올라오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차민규는 스케이트를 벗지 않았다. 4년의 기다림 끝에 평창 올림픽에 출전했다. 출전 자체도 기적이었는데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메달을 따냈다. 어두웠던 베이징 올림픽 전망도 차민규는 은빛 결과로 바꿔놓았다. ‘불운의 스케이터’ ‘깜짝 메달리스트’라는 별명과 미련 없이 작별했다.
이날 세계 최고 스프린터들이 서는 포디움(시상대)에는 동메달(34초 50)의 모리시게 와타루(일본)까지 한중일 3개국 선수가 올랐다. 차민규는 포디움에 오르기 전 시상대를 손으로 쓸어내는 동작을 했는데 중국 일부 네티즌들은 이 동작을 문제 삼아 맹렬히 비난했다. 평창 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계주 시상식 때 동메달의 캐나다 선수들이 판정에 항의하는 의미로 취했던 행동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심판 탓 말고 실력을 탓하라” “왜 한국인들은 패배를 인정 못 하나” 등의 반응이 중국판 트위터 웨이보를 달궜다.
이에 차민규는 13일 “시상대가 내게 소중하고 값진 자리기 때문에 더 경건한 마음으로 올라가겠다는 취지였다”며 “그런 의미에서 존중한다는 의미로 세리머니를 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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