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주요 웨이퍼 기업의 경고등은 지난해부터 업계에 드리운 반도체 공급망 불확실성 문제가 쉽게 걷히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신호다. 정보기술(IT) 수요 폭증과 자동차 전장화는 물론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한 원자재값 상승, 물류 마비, 인력 문제 등 생산성에 악영향을 주는 요인들이 심화하는 현상을 분석한 뒤 나온 발언으로 해석된다. 게다가 세계 반도체 패권 다툼으로 아시아와 미국·유럽 등 기술 선진국을 중심으로 글로벌 반도체 회사들의 설비 투자가 공격적으로 이뤄지면서 문제가 장기화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갖은 힘을 쏟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세계 웨이퍼 시장에서 50% 이상 점유율을 차지하는 섬코와 신에쓰화학의 지난해 웨이퍼 매출은 일제히 성장세를 보였다. 섬코는 지난해 매출 3360억 엔(약 3조 4900억 원), 영업이익 515억 엔을 기록했다. 매출은 2020년보다 15.2%, 영업이익은 36%나 성장한 수치다. 신에쓰화학 역시 웨이퍼 사업을 포함하는 ‘전자재료’ 사업부의 지난해 4~12월 매출 및 영업이익이 각각 17.1, 16%씩 늘었다.
이들의 성장세는 웨이퍼 공급 부족으로 인한 시장 가격 상승이 뒷받침했다. 특히 반도체 업체들이 압도적인 웨이퍼 제조 기술을 확보한 양사 의존도가 높아지는 경향이 짙어지면서 가격 협상에서 더욱 우위를 가져간 것으로 풀이된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이들의 제한된 설비 투자 여력이다. 섬코와 신에쓰화학 모두 웨이퍼 생산 설비 확충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은 점이 포인트다. 섬코는 최근 실적 발표 자료를 통해 4년 뒤인 오는 2026년까지 세계 12인치(300㎜) 웨이퍼 시장은 공급 부족 현상이 뚜렷하게 진행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신에쓰화학 역시 신규 설비 투자가 만만치 않음을 강조했다. 회사 관계자는 최근 열린 실적 발표회를 통해 “건설 자재 및 제조 장비 가격 상승 증가가 이어지고 있고 지난해 고려했던 투자액 예상치를 훨씬 웃돌고 있다”며 “단기간에 눈에 띄는 생산 능력 증가를 기대하기가 쉽지 않다”고 경고했다.
상황의 심각성은 비단 웨이퍼나 기초 소재 영역만 해당하지 않는다. 반도체 장비 시장 곳곳에서도 공급망 문제에 대한 언급이 이어지고 있다. 세계에서 첨단 반도체 핵심 제조 장비인 극자외선(EUV) 노광기를 단독으로 생산하는 ASML도 기기 내 탑재돼야 하는 반도체 칩과 부품이 부족해 대책을 세우고 있다. 손톱만 한 칩 확보가 어려워 대당 1500억 원을 호가하는 반도체 장비가 제때 출하되지 못하는 셈이다. 피터 베닝크 ASML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말 열린 2021년 4분기 실적 설명회를 통해 “장비 수급에 필요한 칩을 확보하려고 협력사와 긴밀히 협력하고 있지만 상황을 개선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밝힌 바 있다.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생태계에서 극심한 공급 부족 현상이 벌어진 이유는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유례없는 수요 증가 랠리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2020년 4분기부터 시작된 극심한 차량용 반도체 부족 현상에 이어 비대면 수요 증가로 각종 IT 기기 수요 폭발까지 동반되면서 각 반도체 제조사의 생산량이 급격히 늘어났다. 올해도 이 분위기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시장조사 업체 IBS는 올해 반도체 시장 규모가 지난해보다 20%가량 성장한 645억 달러를 기록할 것으로 보이고 2030년까지 이 흐름은 이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신규 반도체 공장 투자 붐도 소부장 공급 부족이 지속되는 중요한 요인이다. 반도체 기술 선점으로 세계 패권을 노리는 미국과 중국, 기존 반도체 강국인 한국과 대만을 중심으로 신규 설비 투자가 수십 조 단위로 늘어나자 각 분야 소부장 회사들이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는 올해 세계 반도체 공장 장비 투자액이 980억 달러(117조 원)를 상회하며 역대 최고치를 기록할 것으로 내다봤다.
따라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양대 반도체 제조사들은 공급망 점검에 힘을 쏟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지난해부터 일본 웨이퍼 수급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주요 경영진이 직접 일본을 방문하는 방안을 검토하거나 외국 주요 장비사를 만나기 위해 코로나19를 뚫고 해외 출장에 나서는 등 공급망 위기 대응에 만전을 기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석희 SK하이닉스 사장은 지난해 11월 말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장비사들과 굉장히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고 있다”며 “유력 장비 회사 CEO들과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아울러 양대 기업의 노력은 물론 각종 공급망 위기에 대응해 국내 소부장 경쟁력 강화를 위한 업계의 전반적인 관심이 모여야 한다는 진단도 나오고 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